<CEO의 이력서>
타파웨어 CEO, 릭 고잉즈 이야기 1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고잉즈는 내가 만났던 다른 CEO들과 전혀 공통점이 없었다. 내가 처음 이메일을 보냈을 때도 22분 만에 답장을 했다.
“우리는 이야기할 게 많습니다. 처음에 해군에 입대했고, 대학을 그만두었으며, 제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외국으로 나갔죠.”
타파웨어 브랜즈는 물론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회사다. 음식 보관용기 제조사로서 1950~1960년대 전후 미국의 경제호황과 이 회사만큼 밀접하게 엮여 있는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1940년대 말 처음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타파웨어는 같은 이름을 가진 창립자인 얼 타파(Earl Tupper)에 의해 몇 년 전 설립된 상태였다. 타파웨어는 여성들이 노동력의 일부로 편입되고, 베이비붐 현상이 나타나고 미국의 경제가 성장의 정점에 있을 이르렀을 때 시장에 반향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타파웨어는 그 유명한 ‘타파웨어 파티’를 통해 마케팅을 시작했다. 타파웨어의 주고객층인 여성들이 저녁식사에 친구들을 초대해 어울리면서 타파웨어 제품을 구입하곤 하던 파티를 말한다. 1950년대부터 타파웨어는 회사의 여성 마케팅 부사장인 브라우니 와이즈(Brownie Wise)의 영업 능력 덕분에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지금도 타파웨어는 파티 계획을 통해 가장 많이 팔리며 1990년대 전성기에 비해서는 조금 줄었지만 거의 100여 개 나라에 지사를 두고 있다. 아직도 수십억 달러 규모의 회사로 2015년 매출 20억 달러 이상, 순이익 1억 8500만 달러를 기록했으며 직원 1만 명과 전 세계 영업조직에서 310만 명의 영업사원을 고용하고 있다. 고잉즈는 20년 동안 CEO를 하면서 회사의 발자국을 아시아와 중남미 같은 신흥시장으로 넓혔다. 중남미는 현재 매출이 가장 많이 나오는 지역이다.
이메일을 처음 교환한 후 고잉즈는 몇 달 후 만나는 데 동의했다. 그가 당시 스위스를 여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만난 CEO 중 많은 사람들은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 연례회의를 통해 연결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다른 참석자들과는 달리 고잉즈의 유일한 참석 이유는 세계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비즈니스 미팅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말했다. “우리가 여기 온 이유는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상대방이 비즈니스 얘기를 하려는 것을 알았을 때 5분 만에 미팅에서 나가버린 적도 있죠.”
그것이 내가 그해 내내 다보스에 만난 다른 몇몇 사람들의 의도와 진정으로 대조되는 부분이었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의도였지만, 현재 또는 미래의 비즈니스 파트너를 따라잡는 것도 의도 중 하나이기도 했다.
고잉즈가 참석 의도 면에서 전형적인 CEO가 아니라는 생각은 자리에 앉으면서 바로 확인이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인 열일곱 살 당시 고잉즈의 삶은 도대체 위대하게 될 것 같은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골치 아픈 집안 상황” 때문에 그는 일리노이 주 위튼에 있는 셋방에서 살면서 소파 겸용 침대에서 잠을 잤다. 대학은 언감생심이었다. 등록금을 낼 돈이 없었다. 고잉즈는 위튼과 시카고 외곽을 돌아다니며 ‘그롤리어 소사이어티(Grolier Society)’ 백과사전을 팔았다. 그렇게 하면 최소한 살 수는 있었다. 아니, 그렇게 그는 생각했다. 슬픈 현실은 그가 “90일 동안 책을 가지고 돌아다녔지만 결국 한 세트도 팔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얘기가 재밌어지는 거 아니겠어요?” 옛날 일을 생각하면서 그는 말했다. “가장 높이 평가되는 소비자 직판회사의 CEO가 됐지만 실제로 제가 직접 물건을 팔지는 못했다는 것이죠.”
그가 직접 판매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노력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여름 내내 고잉즈와 다른 청년 몇 명은 밴을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줄기차게 방문영업을 펼쳤다.
“전략은 이거였어요. 그롤리어 소사이어티 백과사전을 공짜로 주고 향후 10년 동안 매년 업데이트되는 책들을 의무적으로 사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공짜 면도기를 나눠주면서 면도날을 비싸게 파는 것이죠.”
몇몇 동료들은 판매에 성공하기도 했지만 고잉즈는 내성적인 성격이라 고전을 면치 못했다.
“영업을 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향적인 성격입니다. 거절을 당하면서도 문을 두드리죠. 저는 문을 두드리는 것이 늘 두려웠고, 거절도 잘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계속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고잉즈는 포기하기 않았다. 그는 “성공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중요하고 결정적인 특징 중 하나는 너무 빨리 포기한다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젊은 세일즈맨들이 오고가는 것을 지켜봤다. 어떤 사람들은 성공했고 세일즈팀을 꾸리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며칠 만에 실망하고 그만뒀다. 그들이 그러는 동안 고잉즈는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다.
“그 90일 동안 믿을 수 없는 정도의 발전을 했습니다. 제 자신에게 계속 말했습니다. ‘나는 다음 단계, 또 다음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라고요.”
하지만 여름이 끝나갈 때 그의 주머니 속에는 몇 달러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고잉즈는 이제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가진 마지막 돈으로 빵 한 덩어리와 땅콩버터 한 병을 큰 걸로 샀다. 그는 일주일 동안 그것을 먹었다.
“그 90일이 끝나갈 무렵 한 부부에게 그롤리어 백과사전을 팔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했다. “사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매우 친절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해군에 가서 대학에 진학했다고 말했어요. 그 사람은 좋은 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 나이가 서른두세 살 정도 되어 보였어요. 그때가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에게 ‘이제 이 일은 끝이다. 우리 팀에서 누구보다 더 오래 버텼어. 이제 뭔가 다른 일을 할 시간이야’라고 말했습니다.”
해군은 실용적인 선택으로 보였다.
“거기서 나의 미래를 껴안고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말했다. “입대를 하면 등록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일종의 용병 같은 것이었지요.”
일주일도 안 돼 고잉즈는 일을 그만두고 미시간 호숫가에 위치한 해군부두에 가서 입대했다. 하지만 그는 일을 그만두면서도 그만두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충분히 했기 때문이었어요. 군대에 가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죠.”
다시 3개월 후, 고잉즈는 훈련을 받고 있었다. 인생을 뒤바꿔놓게 될 일이었다. 자신감 있는 청년으로 변해 리더십 스킬을 배우고 장학금도 타 결국 대학에도 진학할 예정이었다.
“해군 입대를 추천해준 사람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 흥미롭네요.” 고잉즈는 회상했다. “하지만 기억이 난다면 찾아가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중에 고잉즈는 비슷한 생각을 하나 더 말했다. “감사하다고 충분히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성공해도 그 성공을 도와준 사람들과 나누지 않습니다.”
수십억 달러 규모의 직판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이 초년에 백과사전을 팔고 군에 입대한 경험을 가졌다는 것은 믿기 힘들다. 또는 그 반대의 관점에서도, 20대 초반까지는 대학 공부를 꿈도 꾸지 못했던 고잉즈 같은 청년이 타파웨어 브랜즈 같은 회사를 경영하게 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내 이 부분에 대해 파고들었을 때 그는 자신이 가진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성공의 씨앗 대부분은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에 뿌려졌다고 강조했다.
고등학교 시절 고잉즈는 두 번째로 키가 작았고 눈 한쪽이 안으로 몰려 있었다.
“운동을 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까지 동정을 지킨 학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해군에 입대했을 때 그는 키가 커지고, 강해지고, 더 자신감이 생겼다.
“졸업할 때는 170cm였던 키가 몇 달 만에 182cm로 자랐습니다. 눈 수술도 받았습니다. 그 모든 것이 저를 변화시켰어요.”
고잉즈가 리더십을 갖출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은 매우 결정적인 일이었다. 신병들에게는 필수였던 입학 필기시험에서 그는 어느 정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 결과, 100명의 소대원 중 소대장으로 뽑혔다.
“재미있었어요. 저는 보통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 전 미국 국무장관)와도 이 얘기를 농담으로 주고받았어요. 라이스는 제가 알고 있는 가장 똑똑한 사람 중 하나였지만 우리 둘 다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은 적이 없었죠. 하지만 이 특정한 시험에서 성적이 잘 나온 것이었어요.”
소대장으로 지명된 결과로 고잉즈는 훈련할 때 수병들을 이끌어야 했다.
“동등한 사람들 가운데 내가 첫 번째였다는 의미죠. 수영장 훈련을 할때도, 화재가 발생한 집에 진입하는 훈련을 할 때도 항상 제가 먼저였습니다.”
그 경험이 그를 진정한 팀 플레이어로 만들었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말하곤 했어요. 전투에 투입되면 고잉즈야말로 옆에 두고 싶은 동료 중 하나라고 말이에요. 뚫고 나가야 했어요. 그만둘 수 없었죠.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중에 고잉즈는 아직도 팀 의식과 협업을 강한 리더십에 있어서 필수적이며 해군 시절 훈련경험이 그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들의 기초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