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과 함께하는 내 인생의 키워드 10>
<이름 보따리>
이름 짓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책 제목도 『이름 보따리』입니다. 위로 형과 누나들은 모두 이름이 있는데 일곱째인 자기만 이름이 없는 꼬마 늑대는 슬퍼서 자꾸 눈물이 납니다.
어느 날 자기처럼 이름이 없는 꼬마 동물들과 함께 하얀 턱수염 할아버지를 따라갔더니 등에 지고 있던 이름 보따리를 열어 맘껏 이름을 고르라고 합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이름이 가장 멋지다는 말에 꼬마 늑대는 끝까지 기다렸다가 맨 마지막에 보따리를 열었는데 텅 비어 있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러나 슬픔에 잠긴 꼬마 늑대의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는 잘 참고 기다렸다며 칭찬을 하고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이름을 주고 떠납니다. 그 이름은 바로 ‘이름 주는 이’였습니다.
누구는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편하면 좋은 이름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이름에는 그 사람의 운명이 담기므로 최대한 그 뜻과 이름 짓는 방식에 맞춰지어야 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부르기 좋으면 된다고 해도 함부로 지을 수 없고, 또한 아무리 그 뜻이 좋다고 해도 부를 때 불편하거나 다른 의미가 연상되는 바람에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운명을 바꿔보려고, 혹은 놀림 받는 일을 면하고자 개명을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초등학교를 졸업한 정도의 나이가 된 여자아이를 데려다가 집안일을 시키며 야간학교에 보내주는 일이 흔하던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친구네 집에 수더분하게 생긴 아이가 한 명 왔기에 이름을 물어보니, 부르는 이름은 ‘희자’고 호적에는 ‘회자’로 되어 있다며, 그냥 ‘희자’로 부르면 된다고 합니다. 호적 이름 따로, 집에서 부르는 이름 따로, 그리 낯선 일이 아니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나중에 사연을 알고 나니 마음이 아렸습니다.
위로 언니 오빠가 여럿 있었고 그 아래로 연년생 딸이 두 명 태어났는데, 작은 아이의 출생 신고를 미루고 있던 중에 위의 아이를 그만 홍역으로 잃게 되자 큰 아이의 사망 신고를 하지 않은 아버지가 작은 아이의 출생신고마저 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니 ‘희자’는 분명 그 집 막내딸이지만 공식서류에 ‘희자’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고 언니였던 ‘회자’의 신분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 것이지요.
아기가 새로 태어나면 미리 이름을 지어놓지 않은 이상 그냥 아기라고 부릅니다. 부르던 태명이 있으면 제 이름이 생기기 전까지 태명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공식적으로 밝히며 우리는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름이 없어 슬퍼하다가 ‘이름 주는 이’가 된 꼬마 늑대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는 대부분 세상에 태어나 부모를 비롯해 누군가에게서 이름을 얻고, 그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그런 이름과 달리 인터넷상에서 사용하는 닉네임, 즉 별명이나 애칭은 스스로 만들고 지어내는 것은 물론 수시로 바꾸고 그 개수에도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저는 2000년도부터 인터넷 공부모임을 운영하고 있는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상관하지 않고 서로 닉네임으로 부르니 좋은 점이 많습니다. 그중 가장 큰 장점은 아무래도 나이나 성별에 대한 선입견 없이 서로에게 자유롭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심사숙고의 결과물이든 떠오르는 대로 부담 없이 만들었든 아니면 장난스럽게 붙인 것이든 닉네임 또한 이름만큼이나 그 사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만나다 보니 나중에는 실명은 물론 나이, 가족관계 등 개인사를 조금은 알게 되었지만 닉네임이 그 사람을 그대로 담고 있어 인상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닉네임을 지을 때 이들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이름 주는 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겠지만, 이들을 떠올리면서 저는 문득 닉네임처럼 스스로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일에도 조금은 신중한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는 전설이다
아래 빈칸에 자신의 소중한 내용을 기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