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Aug 28. 2017

05. 모든 것은 태교에서 시작된다.

<칼 비테 교육법>

일찍이 나는 소망대로 특별히 사랑스러운 내 아이를 낳아 양육해줄 젊은 여자를 선택했고, 그 여자는 내 목적을 장려해줄 모든 일을 해낸 반면, 내 목적에 방해가 될 모든 것을 피했다.

내 이상을 생생하게 눈앞에 보여주기 위해 그 여자에게 신부로서 다정한 이름을 지어주었다. 보센스 루이제가 바로 그 이름이었다.

우리 둘의 결혼 생활은 완전히 건강하고 근심 없고 쾌활하고 즐겁게 시작되었다. 아직 아이가 없는 데다 힘든 일, 특히 곤궁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내 공직이 허용하는 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우리 지역의 안락하고 진기한 것들을 눈여겨보았고 유쾌한 사람들과 교제를 즐겼으며 불안한 생각 없이 싹틀 존재를 가장 분별 있게 돌보았다.

나는 한때 고통스러운 걱정거리가 있었지만 젊은 아내에게 최대한 감췄다. 엄청나게 사기를 당해 곤궁에 빠졌지만 절약을 하며 임신한 아내가 모르게 했다. 내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합리적인 방법으로 늘 갖추어주었다. 아내가 더는 요구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절박하고 끔찍한 불행을 예견했을 때 아내가 값비싼 것을 원했다. 나는 아내가 원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들어주었다. 아내의 건강과 교양을 위해, 존재의 완전성을 위해 장려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내는 자기 친척을 전부 다시 보고 싶어 했고 내 친척도 만나고 싶어 했다.

우리는 로하우에서 데사우를 거쳐 베를린으로 가야 했다. 여러 도시를 두루 거치는 장거리 여행이라서 내가 감당하기엔 비용이 너무 컸다. 겉보기에 그 여행은 유용해 보였고 아내가 나를 깊이 사랑하는 증거였기에 기쁜 마음으로 여행을 감행했다. 나는 편리한 차를 샀고 여행도 떠났다. 내 명예, 재산, 평정을 역행하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내가 후회하지 않게 했다. 임신한 아내는 자신과 아이에게 무엇이 가장 유용한지 확신했다. 아내는 장거리 여행을 아주 쾌적하게 느꼈고 여행이 교양에 미치는 영향을 아주 분명하게 깨달았다.


1798년 5월에 나와 가까운 친구들이 많이 살고 아내의 가까운 친척도 살고 있는 그라프샤프트의 만스펠트까지 올라갔다. 동시에 우리는 주목할 만한 것을 모두 보면서 6일 만에 거의 15마일(약 24킬로미터–옮긴이)이나 걸었다. 하지만 아내는 여행에 대만족이었다. 물론 아내도 피곤해했고 용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적절한 음식과 음료를 즐기며 평정을 찾았고 전혀 피곤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금세 회복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내는 지인들에게 우스웠던 도보 여행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했다. 모든 도보 여행이 그렇듯 기억해보면 즐겁고 우스꽝스러운 일이 있었다. 나는 도보 여행의 모든 것을 뒷받침해주었고 아내에게 계산서를 보여주었다. 즐거운 여행에 얼마나 비용이 적게 들었고 차에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어야 했는지. 그랬더니 아내는 내가 예견한 대로 “앞으로는 늘 걸어서 여행하고 싶어요!”라고 다짐했다. 나는 그 다짐에 흡족했다.

우리는 여유 있게 시간을 들여서 어디로 갈지 머리를 짜고 생각을 했다. 내가 가장 고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평지에서 수일간 걷는 것은 아내에게 무리라고 쉽게 간파했기에 아내가 하르츠 산맥의 최고봉인 브록켄에 관심을 갖게 했다. 아내에게 이 산은 높은 산이기도 하고 이미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들었던 산이기도 했다. 나 역시 아내에게 그 산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브록켄 여행을 결심했고 1798년 7월과 8월에 실행으로 옮겼다.

우리는 만스펠트에 들러서 며칠간 친구들과 지내다가 마치 우리 집 밖으로 나오듯이 상쾌하게 도보 여행을 이어갔다.

우리는 늘 산맥에 머물면서 온갖 기묘한 것을 눈여겨보았다. 며칠 만에 우리는 도보로 브록켄까지 갔다. 날씨는 계속 좋았다. 근사한 저녁과 아름다운 아침을 즐겼다. 아내는 더 높은 세계에서 굽어보며 마법에 걸린 기분이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까지 걸어오니 얼마나 좋으냐고 말했다. 아내는 사랑스럽게 내게 기대며 고맙다고 했다. 아내 눈에 고인 부드러운 기쁨의 눈물이 언어로 표현한 것 이상을 말해주었다.

더 이상은 생략하겠다. 우리는 아주 행복하게 로하우로 되돌아왔다. 우리 부부가 첫아이(언제까지나 잊지 못할 것이다)를 잃은 슬픔을 위로하고 다시 이전의 밝은 모습을 찾아야겠다는 주목적이 이루어졌다. 아내는 이전처럼 다시 건강과 활기를 되찾았다. 아, 하지만 로하우에서, 오히려 주변 지역에서 흑색 비방이 일었다. 디스카우에서부터 악의적인 농담이 퍼졌다. 내가 젊은 아내에게 나와 같이 시골을 돌아다니자고 전제 군주같이 강요했을 것이라고. 아내의 의지를 거슬러서 끔찍한 날씨에 험한 산길을 끌고 다녔을 것이라고. 아내는 그런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중에는 브록켄 여행에 대해, 하늘이 내려준 여행길에 대해 친구들에게 두고두고 이야기하고 편지로 알려주었다. 아내는 그런 도보 여행을 아주 좋아해서 또 가자고 수없이 졸랐다.

5년 뒤에 내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절약해서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나게 되자 아내와 함께 차로 멀리 여행하는 것도 즐기게 되었다. 아내는 차로 여행하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자동차 여행은 브록켄 도보 여행처럼 오래도록 웃음을 주지는 못했다.

아내가 또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나도 그러고 싶었다. 차로든 도보로든 기꺼이 장거리 여행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차로는 여행하지 못했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보 여행도 다시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도보 여행은 살림, 일 등 이런저런 근심거리를 깡그리 잊게 해서 유익하고 순진무구한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해주고, 고향이 없지만 도처가 고향이게 해주고, 온갖 쾌적함을 누리게 해주고, 감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내의 교양에 영향을 끼쳤다.

아내는 다시 사랑스러운 임신부가 되었다. 나는 최대한 깊은 걱정을 숨기고는 우리의 넉넉지 않은 처지보다는 즐겁게 살려고 애썼고 근거리 여행을 많이 했다. 멀리 여행하는 것은 내 힘에 부쳤으니까.

따라서 아직도 살아 있는 칼이 가장 행복한 환경이 갖춰져 있는 듯했던 죽은 형보다 훨씬 불리한 환경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서 양육되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하다. 아, 나 자신이 즐겁지 않았다. 산모의 영양 섭취에 대한 걱정뿐만 아니라 날마다 쏟아지는 나에 대한 흑색 비방을 다시 들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짜증이 나서 생활력이 파괴되고 쾌활함이 죽고 화가 치밀었다.

이럴 때마다 시로 지어준 육아 비서가 최고의 안식처였다. 그 비서가 내 마음에 평화를 주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04. 혼자회의의 기본, 질문을 떠올려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