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Sep 01. 2017

01. 로마시대 엽기적인 공중변소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로마의 공중변소인 포리카(forica)에서는 남녀가 내외도 하지 않고 긴 벤치에 앉아 점잖게 잡담을 하면서 대변을 보았다. 그 아래로는 하수도가 흐르고 있었다. 영국인답게 지하철에서 시선이 마주치는 것조차 못 견뎌 하는 나로서는 생각만으로도 괴롭고 소름 끼치는 상황이다. 그러나 로마인은 분명 거리낌이 없었다. 수도 로마에만 엉덩이를 나란히 하고 앉는 공중변소가 144개에 이르렀으며, 로마제국의 다른 지역에도 수없이 많은 공중변소가 생겨났다.


현재 시리아의 영토인 아파메아(Apamea)에는 한 번에 약 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변소가 있었다. 그러나 공중변소 대부분은 정원이 12명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포리카 한 귀퉁이에는 세면기와 부드럽게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가 설치되었으며, 바닥 가장자리를 따라 수로가 흘렀다. 기본 위생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포리카 내부가 얼마나 밝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창문이 없는 포리카도 있었으니 빛이 들지 않아 어느 정도 익명성이 보장되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벽면이 화려하게 장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부끄러움 많은 사람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한 장식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고귀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건물이라서 아름답게 꾸몄던 것일까? 어떤 경우든 실내가 어두컴컴하다면 벽을 칠할 필요도 없었을 터이다. 따라서 포리카 안이 온통 깜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스티아 안티카(Ostia Antica)에서 발견된 공중변소에는 일곱 현인의 방이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둘러앉아 배변에 대해 논하는 벽화가 멋지게 그려져 있다. “교활한 킬론(Chilon)은 남들 모르게 방귀 뀌는 법을 가르쳤다”와 같은 웃긴 문구들도 덧붙여져 있다. 12명이 항문으로 나팔 부는 소리가 교향악처럼 울려 퍼진다는 사실을 장난스럽게 표현한 문구일까? 아니면 타인을 생각해서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은근슬쩍 전달하는 문구일까? 방귀를 참느니 힘껏 뀌는 것이 그 시대 관습이었으리라 추정된다.

배변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 이를 악물고 두 배로 힘을 주어야 한다는 내용도 보인다.

“탈레스(Thales)는 변비가 있는 사람에게 안간힘을 쓰라고 조언했다.”

많은 만성 변비 환자가 탈레스의 조언에 따라 용을 쓰면서 아름답지 못한 소리가 났겠지만 사람들의 말소리와 물소리가 어느 정도 그 소리를 가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리는 그렇다 쳐도 뻥 뚫린 하수도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악취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로마시대 공중변소 풍습에서 가장 끔찍한 부분은 밑을 닦는 방법이었다. 로마인은 화장실뿐만 아니라 화장지도 공유했다. 실제로 고대 로마의 하수도에서는 오물이 묻은 헝겊이 수없이 출토되었으며, 그 시대 기록에 따르면 나무막대 끝을 해면으로 감싼 실로스폰기온(xylospongion)을 이용자 간에 나누어 썼다고 한다. 쓰고 난 실로스폰기온은 바닥 가장자리를 흐르는 수로에서 씻은 다음에 냄새를 없애기 위해 포도 식초가 담긴 병 속에 보관했다. 무엇으로 보나 아주 위생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특히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경기장으로 내몰리는 일이 싫었던 게르만인 검투사가 변소로 도망가 똥 닦는 해면을 목구멍에 쑤셔 넣어 자살했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 검투사 말고도 여러 명이 로마시대 위생처리 시설 때문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기원전 500년경 로마 초기 국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Tarquinius Superbus)는 대규모 하수도인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를 건설했는데, 어찌나 고된 노역이었는지 이때 강제로 동원된 인부들이 도주는 물론이고 자살하는 일이 많았다. 

국왕이 인부들에게 일터로 돌아오지 않으면 십자가에 매달아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할 정도였다. 다행히 폭군 타르퀴니우스는 얼마 후 축출되고 로마 공화정이 들어섰지만 이 역시 훗날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는 동안 제국으로 바뀌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치세는 대체로 평화로웠다. 그는 그처럼 평화로운 기간 동안 클로아카 막시마를 크게 확장했다. 그러나 클로아카 막시마 확대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사람은 황제의 오른팔 아그리파 (Agrippa)였다. 도시 중앙의 하수로에서 갈라지는 지류를 7개로 늘린 것이 그의 대표적인 업적이었다. 확장된 하수도망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아그리파가 배를 타고 다니면서 조사할 정도였다. 지하의 똥 운하에 곤돌라가 떠다닌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나 영광스러운 로마의 공학기술을 총집결하여 만든 로마의 하수도도 누구에게나 공개된 것은 아니었다. 돈을 내고 공중변소를 이용하지 않는 한 하수도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하수도의 혜택을 볼 수 없었고, 배설물을 알아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로마인도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가정에서는 주로 요강에 의존했다.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은 집 안에 따로 화장실을 둘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자기 지위에 걸맞은 금테 두른 요강을 사용하면서 뿌듯해했을 것이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그가 순금 요강을 썼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가장 원초적인 신체작용조차 과시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듯 요강에 보석을 박는 사람도 있었다. 미천한 백성들은 길거리에 나가 요강을 비우는 일이 보통이었다. 심지어 창문 밖으로 쏟아버리는 바람에 지나가던 사람이 봉변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스의 코프롤로고이처럼 요강의 내용물을 수거한 다음에 농부와 축융공(fuller: 모직물에 열이나 압력을 가하여 조직을 촘촘하게 가공하는 직공)에게 비료와 염료로 팔아 돈을 버는 직업군도 있었다. 이러한 사업의 수익성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인색하기로 악명이 높던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황제가 인간의 배설물에 세금을 부과하여 반짝반짝한 금화를 벌어들였다고 의기양양 해할 정도였다. 말 그대로 똥오줌 가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02. 동학농민혁명과 의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