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Sep 01. 2017

03. 터져 나온 '독립만세'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한국 민중의 독립운동은 일본에 의한 병탄 후에도 지각변동의 에너지가 쌓여가듯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전국적인 3·1운동

그 정점에 위치해 있는 것이 1919년 3월 1일에 지금의 서울에서 시작되어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된 3·1운동입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이후, 지도자 레닌과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의 이념을 주장했던 일도 3·1운동과 중국에서 일어난 5·4운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에 다양한 형태로 저항을 시도했던 고종 황제의 죽음(1919년 1월)을 계기로, 조선민족 전체의 독립운동은 단숨에 고양되었습니다. 민족종교인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지도자들이 ‘독립선언’을 기초했습니다. 서울시 중심부의 탑골공원에서 학생 대표가 선언문 낭독을 마치자 독립만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이 울려 퍼지며 태극기를 손에 든 사람들이 대열을 지어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이 공원의 비석에 새겨진 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려 인류 평등의 큰 뜻을 분명히 하는 바이며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다 체포된 조선인 학생. (『화보 일본 근 대의 역사』)


재일한국인 역사자료관 관장이자 역사가인 강덕상(姜德相)은 말합니다. “3·1운동은 헌병 정치하에서 가득 차오른 물이 넘쳐흐르듯 일어났습니다. 아울러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 윌슨의 민족자결권 선언에도 영향을 받았지요. 핍박받는 민족의 해방이라는 세계사의 흐름에 발맞추어 전개된 운동이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01. 로마시대 엽기적인 공중변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