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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01. 2017

02. 동학농민혁명과 의병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일본의 한국 침략은 한국에 확산된 민중운동의 고양과 이에 이빨을 드러낸 군국주의 일본에 의한 탄압 및 섬멸 전쟁을 보여주는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우선 언급해야 할 것이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갑오농민전쟁)입니다. 당시 동학군은 진압에 나선 정부군을 격퇴하고 지방의 중심 도시(전주)를 점령할 정도로 힘이 있었습니다. 그 뒤 동학농민혁명은 왕궁 점령을 시작으로 한 일본군의 침공에 대항하여 항일의 기치를 내세운 운동으로 발전합니다.

전국으로 확대된 반일 의병운동에 참가한 의병들. 민중의 자발적 무장 조직으로, 15만 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화보 일본 근대의 역사』)


이 농민운동은 예전에 ‘동학란’으로 불렸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최초의 민주혁명운동으로서 반제·반봉건의 선구적 운동으로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은 한국 정부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병력을 파견하여 농민군을 살육했습니다. 그 희생자가 적게는 3만 명, 많게는 5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농민군을 섬멸하는 작전에 종군한 병사의 『진중일기』를 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가 도쿠시마 현 향토사가의 도움을 받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1895년 1월 31일) 잔류한 동학도 7명을 잡아와 이를 성 밖의 밭에 한 줄로 세워, 총에 대검을 끼운 뒤 모리타 지카토시(森田近通) 상사의 구령에 따라 일제히 찔러 사살하고 구경을 시키자, 한인 및 통영병(조선군 병사) 등이 심히 경악하다.” 중일전쟁에서 빈번했던, 포로를 총검으로 일제히 찔러 살해하는 사례가 이미 청일전쟁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1906년에서 1911년까지는 ‘항일의병전쟁’이 일어납니다. 상층 계급 출신과 기독교인, 해산된 한국 군대의 병사 등이 참여한 무장투쟁이었습니다. 이에 일본이 ‘진압’ 전쟁을 벌여 4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살해하는 등, 한국을 피로 물들이는 가운데 병탄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끝내 항일투쟁을 억누르지 못했으며, 병탄 후에도 3·1운동 등으로 그 흐름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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