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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01. 2016

01. 불행한 생애, 행복한 예술가 천경자

<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

                                                                   

<노오란 산책길> 1983


천경자 회고전을 치른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이후 몇 차례 천경자 작가론을 주제로 강의했다. 강의 마지막에 나는 청중들에게 천경자가 유언한다면 무슨 말을 할 것 같으냐고 물었다. 잠시 대답을 기다린 뒤 “내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일 것이라고 답했다. 거창한 이야기를 기대하던 사람들은 실망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반농담조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자신의 추한 모습을 결코 타인에게 보이려 하지 않는 그녀의 취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5년 그녀의 죽음에 대한 나의 예언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1998년, 천경자는 건강이 악화하자 9월 미국으로 건너가 맨해튼에 있는 큰딸 이혜선 씨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해 11월 자신의 피붙이 같은 작품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기 위해 잠시 들른 이후, 다시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허드슨 강변에 나가 스케치도 하고 집에서 그동안 스케치한 작품들을 채색하며 붓을 놓지 않았으나 2003년 뇌일혈로 쓰러진 이후에는 거동이 힘든 상태가 되었다. 자신이 병든 모습을 노출하는 것을 싫어한 탓에 그녀는 가족 외에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자식과 다름없는 작품이 있는 한국이 그리웠겠지만, 끝내 방문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유골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을 찾았다.
     
한국에서는 10년 이상 소식이 단절되자 천경자가 이미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천경자의 생사는 2013년 말 예술원이 개원 60주년 전시에 출품할 작품을 요청하면서 불거졌다. 천경자를 모시고 있던 큰딸은 “<미인도> 위작 시비와 관련된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 주관하는 전시회에 작품을 낼 수 없다”며 출품을 거부했다. 예술원에서 천경자가 살아 있다는 확인서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큰딸은 “본인과 보호자가 아닌 사람에게 환자 상태를 알려주는 것은 개인의 사생활 침해”라며 거절했다. 그러자 예술원은 2014년 2월부터 매달 180만 원씩 지급해오던 수당을 중지해버렸다. 큰딸은 아예 예술원 회원 탈퇴서를 제출했으나 예술원은 본인의 의사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려했다.
     
그리고 2015년 8월 6일 새벽, 천경자는 미국에서 찬란하고 고독했던 91년간의 전설 같은 삶을 쓸쓸하게 마감했다. 큰딸은 어머니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뉴욕의 한 성당에서 조용하게 장례를 치른 뒤 화장을 했다. 그리고 8월 20일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을 극비리에 방문하여 자식과 같은 작품들을 상봉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지 말아 달라는 큰딸의 요청으로 천경자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다른 유족들조차 그녀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다.
     
다른 유족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10월 중순 무렵이었다. 장남 이남훈(팀쓰리 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회장), 차녀 김정희(몽고메리칼리지 미술과 교수), 사위 문범강(화가, 조지타운대 교수), 차남 故 김종우의 아내 서재란(세종문고 대표)은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어머니의 유해가 어디에 모셔졌는지 알려달라”고 큰딸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아끼고 어머니 작품을 사랑한 관객과 국민에게 영결의 기회를 마련하고 싶다”며 10월 30일 천경자의 작품이 기증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시신 없는 추모식을 했다.
     
천경자의 유골이 어디에 있는지를 두고 논란이 일자 큰딸은 “어머니의 영혼은 그림을 통해 살아계시기 때문에 한 줌의 재에 불과한 유골이 새로운 논란이나 갈등을 만드는 걸 원치 않는다”라면서 “어머니가 생전에 강아지들과 산책하곤 했던 뉴욕 허드슨 강가에 뿌렸다”고 밝혔다. 차녀 김정희 씨는 “문화부가 고인이 최근 활동이 미비했다는 점과 죽음에 의혹이 있다는 점을 들어 금관문화훈장을 즉각 추서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무너지는 비탄을 느꼈다”고 말하며 “어느 예술가나 고령으로 노년에 활동을 못 하는 것이 상식”이니 재검토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결국 수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천경자의 극적인 생애는 끝까지 평탄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게 일본에 유학하여 화가의 길을 걸은 그녀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집안이 몰락하고 결혼에 실패하여 두 남편에게서 낳은 네 명의 자식을 부양해야 했다. 1991년 큰 파문을 일으켰던 <미인도> 사건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전문가 집단으로부터 자신의 작품도 몰라보는 정신병자로 몰리며 씻지 못할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위작 논란의 <미인도>


 이중섭은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무연고 주검으로 3일 동안 방치되었는데, 천경자는 죽은 지 2달이 넘어서야 그 소식이 대중에게 알려졌다. 평생을 고독하게 산 이 두 예술가는 죽음까지 평탄하지 않았다. 천경자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미인도> 사건을 미스터리로 남긴 채 조용히 현실 세계를 떠나 자신이 꿈꾸던 환상의 세계로 떠났다. 언젠가 그녀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죽음이 참 아름답고 편하게 느껴져요. 천국, 지옥, 그런 것 따지지 않고요. 그래서 모델 없이 영의 세계를 구상해서 나름대로 그려보고 싶은 욕망이 요즘 들어 막 솟아나요. 보라나 하얀 목도리가 팔랑거리며 나신의 여인을 휘감아 3차원 영계로 이끄는 그런 환상을요. 그러다 보면 돌아가신 할아버지, 어머니, 동생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항상 환상 속에 살았던 그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죽음을 신비한 또 다른 세계라고 생각해왔다. 현실 세계에서의 삶은 비록 불행의 연속이었지만, 신비한 환상세계는 그녀를 지탱하고 예술을 꽃피우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러한 비극적 현실 속에서도 그녀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행복한 예술가였다. 결국, 모든 것은 잊히겠지만 치열한 예술혼이 담긴 그녀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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