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 취한 미술사>
루벤스 <헤르메스와 아르고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다양한 신과 인간들 그리고 기묘한 외모의 존재들이 등장한다. 외눈박이 거인인 키클롭스가 있는가 하면, 눈이 100개나 달린 괴물 아르고스(Argos)도 있다. 기원전의 옛 유물들을 살펴보면 온몸에 수많은 눈이 박혀 있는 괴물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아르고스다. 그리고 아르고스의 주변에는 항상 그를 칼로 찌르려는 어떤 인물과 함께 소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바람둥이 신 제우스는 이오라는 아름다운 소녀에게 반해서 구름으로 모습을 바꾸어 이오와 사랑을 나눴다. 그리고 이오를 어린 암소로 변신시켜 완전범죄를 계획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눈치챈 아내 헤라가 그 암소를 선물로 달라고 한 뒤 아르고스의 감시하에 두었다. 눈이 100개나 달린 파수꾼 아르고스의 감시에 지친 이오는 비탄에 빠졌고, 이를 지켜보던 제우스는 자신의 아들 헤르메스(Hermes)를 보내서 아르고스를 죽이도록 했다. 목동의 모습으로 위장한 헤르메스는 아르고스에게 접근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갈대피리를 불어 그를 잠들게 만들었다. 이윽고 깊은 잠에 빠진 아르고스는 헤르메스에게 죽임을 당했고 이오는 달아났다.
바로크 회화의 대표적 화가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1635~38년경에 그린 <헤르메스와 아르고스>에는 그들의 신화가 생생히 담겨 있다. 루벤스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긴장된 순간을 그리고 있다. 날개 달린 모자를 쓴 헤르메스는 왼손으로 피리를 불면서 아르고스를 지켜보는데, 오른손으로는 몰래 칼을 숨기고 있다. 아르고스가 잠들면 언제라도 칼을 휘두를 태세다.
아르고스는 아무것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잠에는 장사 없다’는 말은 이런 때 하는 것이다. 아무리 강한 괴물이라도 감기는 눈꺼풀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아르고스는 100개의 눈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루벤스의 그림에서 아르고스의 눈은 두 개뿐이다. 아마도 백 개의 눈을 다 그리는 게 어색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암소로 변해버린 이오는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말은 하지 못하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다 이해한 표정이다. 이 그림을 얼핏 보면 헤르메스와 아르고스 그리고 이오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헤르메스와 아르고스 사이에 있는 나무 위에도 무언가 그려져 있다. 바로 헤라가 공작새 전차를 타고 날아오고 있는 모습이다. 충복인 아르고스가 위험에 빠진 것을 알아차리고 급히 달려오지만 아르고스의 목숨을 구하기엔 이미 늦었다.
루벤스는 이 그림 외에도 헤르메스가 아르고스의 목을 치는 역동적인 순간도 화폭에 담았다. 비슷한 시기에 이 신화를 연작으로 풀어낸 것으로 보인다.
루벤스는 1577년에 독일 베스트팔렌 지방의 지겐(Siegen)에서 태어나 벨기에 안트베르펜과 이탈리아에서 활동하였다. 유창한 화술과 방대한 식견, 예의바른 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솜씨와 작품으로 국제적인 명성과 부를 축적했다. 1626년 사랑하는 아내 이사벨라와 사별하고 외교관으로 유럽을 떠돌던 그는 1630년에 젊은 엘레나와 재혼하였다. 엘레나는 노년의 루벤스에게 많은 예술적인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플랑드르 지방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풍을 두루 섭렵한 후 특유의 생동하는 필력과 화사한 색채로 한 시대를 호령했다. 신화, 종교, 역사, 풍경, 인물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그중에서도 종교와 신화를 주제로 한 대형 작품들이 특히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