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 취한 미술사>
카라치 <디아나와 엔디미온>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파르네세 궁전의 천장은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신들의 사랑>이라는 제목의 이 천장화는 안니발레 카라치와 그의 조수들이 프레스코 기법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천장의 중심에는 <바쿠스와 아리아드네의 승리>가 가장 크게 그려져 있고, 주변엔 여러 신화의 내용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중에는 <디아나와 엔디미온>의 신화도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는 건장한 꽃미남 목동 엔디미온이 개 한 마리와 함께 잠들어 있고, 로마 신화의 처녀신 디아나(Diana)가 엔디미온을 인형처럼 사랑스럽게 끌어안는 모습이다.
독특한 점은 디아나가 달의 여신임을 알리기 위해 디아나의 앞머리에 초승달 모양의 장식을 붙여 놓았다는 것이다.
뒤쪽 수풀에는 악동처럼 보이는 두 명의 에로스가 조용히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디아나가 엔디미온을 찾아오는 시간으로 보았을 때 배경은 밤이어야 맞겠지만 매우 밝은 낮처럼 그려져 있다. 이것은 파르네세 궁전의 천장화 전체가 부드럽고 밝은 분위기인 것과도 관계가 있다. 천장화를 자세히 보면 채색된 <디아나와 엔디미온> 주변에 액자와 조각품들이 장식된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단지 착시효과일 뿐이다. 원래 평평한 천장에 그리자유(Grisaille) 기법으로 액자와 조각품을 그린 것이다. 그리자유 기법이란 회색 같은 단색을 이용해 부조처럼 입체감이 느껴지도록 그리는 방식을 말한다. 이 기법으로 천장화는 풍성한 입체감과 변화무쌍한 역동성을 얻게 되었다. 멀리서 보면 감쪽같이 속게 되는 회화 기법이다.
카라치는 볼로냐 출신으로 로마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카라치 가문에서는 안니발레 카라치 외에도 유명한 화가들을 배출하였는데 그의 형인 아고스티노 카라치와 사촌 형 루도비코 카라치가 그들이다. 이들 삼 형제는 당시에 유행하던 매너리즘 회화의 과장되고 작위적인 표현방식에서 벗어나 대상을 직접 관찰하고 그리는 사실주의적인 표현을 추구하였다. 카라치 형제들은 1583년 볼로냐에 미술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혁신적인 교육을 하였다. 이 아카데미는 유럽의 수많은 아카데미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595년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주교의 초청으로 로마에 간 카라치는 파르네세 궁전에서 주교의 서재와 갤러리를 장식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가톨릭 주교의 궁전 천장에 이교도적인 그리스 신화에 대한 그림을 그려놓았다는 것이다. 파르네세 주교는 이에 대해 특별히 문제를 삼지 않았다고 한다. 이 파르네세 궁전의 갤러리 천장화가 중요한 이유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같은 르네상스 거장들의 성과를 흡수한 카라치가 고전주의적인 화풍과 장식적이고 자연주의적인 화풍을 세련되게 절충하여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카라치의 화풍은 동시대에 활동하던 카라바조와 함께 초기 바로크 시대를 여는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