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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선데이 페인터, 독특한 화법으로 시선을 사로잡다

<잠에 취한 미술사>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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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잠자는 집시 여인>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밤하늘이 어두운 비취색으로 물들자 하얀 보름달이 떠오르고 별들은 조용히 반짝인다. 그 하늘 아래로 잔잔히 흐르는 강과 메마른 모래 언덕들이 펼쳐져 있다. 커다란 갈기를 가진 사자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언덕을 배회하다가 누워 있는 나그네를 발견한다. 무지개 색깔의 옷을 입은 그는 오른손에 지팡이를 쥔 채 노곤히 잠들어 있다. 맨발의 나그네 옆에 놓인 것은 6개의 현이 달린 만돌린과 기다란 물병뿐이다. 장미색 두건으로 둘러싸인 검은 얼굴은 꿈을 꾸는지 옅은 미소를 짓고 있다. 사자는 살며시 나그네의 어깨 쪽으로 접근하여 무심히 그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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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듯한 이 신비로운 광경은 무엇일까? 사막을 지나가는 집시 여인의 꿈길에 사자가 나타난 것일까? 아니면 투명한 달빛과 침묵의 강 그리고 발자국 없는 사막이 만들어낸 신기루일까?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의식의 풍경 같은 이 시적인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언어를 망각하게 된다. 심리학자 카를 융은 “꿈은 영혼의 가장 깊고 비밀스러운 곳에 숨어 있는 작은 문”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그 작은 문을 열고 하나의 풍경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 기묘한 그림은 앙리 루소가 1897년에 그린 <잠자는 집시 여인>이다. 이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 루소는 자신의 고향인 라발 시의 시장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자신을 스승 없이 독학으로 배운 화가라고 소개하며 고향 도시에서 <잠자는 집시 여인>을 구입하여 소장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루소는 시장의 호의를 기대하며 자신의 소박한 희망을 피력했으나 작품의 구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1897년 이 작품은 전시회에 출품되었는데 전시장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도난당한 작품은 13년 후에 어느 미술 애호가에게 재발견되었으나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그래서 화상 칸바일러가 이 작품을 사들여 복원했고, 마침내 1939년에 뉴욕 현대미술관이 이 그림을 구입해 소장하게 되었다.

앙리 루소는 27살 즈음에 세관원이 되었다. 그가 어떻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 불분명하지만 파리 근교에서 약 22년 동안 세관원으로 일하면서도 아틀리에를 장만해 계속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퇴직을 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작업에 매진하였다. 그는 원시 열대 우림, 파리 시내와 근교 풍경, 주변 인물들의 초상화 등을 그렸고 <잠자는 집시 여인>처럼 우화적인 그림들도 여럿 남겼다. 앙리 루소의 작품들을 보면 이국적인 원시성과 초현실적인 환상성이 넘쳐 난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정작 그가 파리를 떠나 멀리 여행을 가본 적이 전혀 없음에도 그런 그림들을 그렸다는 점이다. 그는 주변인들에게 자신이 멕시코 전쟁에 참여했을 때 열대 우림을 보았다고 말을 하곤 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파리의 식물원에 자주 갔었고 백화점 홍보 책자나 동식물 도감을 참고하여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1889년에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서 아프리카와 동방 문화가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들어와 유럽에서는 제국주의 식민 활동과 더불어 이국에 대한 동경과 취미가 고조되는 분위기였다.

앙리 루소의 그림들은 소박하게 그려졌지만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도 상당히 엇갈렸다. 하지만 그가 말년에 이르렀을 때 피카소와 아폴리네르 등 당시 젊은 예술가들은 그를 인정하고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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