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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05. 2016

01. 아버지의 영어책, 30쪽

<나는 언제나 술래>

아버지는 시골에서 키우던 소 누렁이같이 기운이 천하장사였지만, 겁이 많았고, 새로운 일을 싫어했다. 어머니가 빚지고 집을 샀는데 아버지는 이제 집안이 망했다며 어머니와 단단히 싸웠다. 이미 잔금이 치러진 다음이라 아버지는 잠을 자지 못했다.


빚지고 집을 산 다음 날로 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끊으셨다. 사람이 어찌 빚을 지고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겠냐고. 고향에선 돈이 없어서 누구도 취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취하면 모두가 부러워했다. 얼마나 돈이 많으면 취하도록 마셨을까 하고.

이유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양반다리를 하지 않았다. 여자처럼 무릎을 하나 세우고 앉은 채로 사흘을 그렇게 계셨다. 나흘째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당신 마음을 모르지 않지만, 이제 새 일을 찾아야 하지 않아요? 한 집안 가장이 이렇게 방에만 있으면 어떻게 해요. 쌀이 떨어지고, 돈이 떨어져 애들이 외삼촌 집으로 돈을 빌리러 갔단 말이에요. 입이 있으면 말을 해보세요.”

아버지는 고향의 집과 전답이 너무도 그리웠지만 이미 소를 팔았고, 일가친척이 다 상경한 데다 시골에 남을 거면 혼자 남으라는 어머니의 악다구니 때문에 고향 가자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러고도 사흘이 지나서 아버지는 취직이 되었다며, 전화까지 해보고 왔다고, 이제 내일부터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아버지가 전봇대에서 본 것은 사우디아라비아 현장노동자 모집공고가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현장노동자 취업을 돕는 학원 공고였다. 예나 지금이나 상담하는 여자의 목소리는 설득력이 있다. 석 달 치 월급쯤 되는 꽤 큰돈을 빌려서 학원에 다녔다. 아주 난리가 났다.

국민학생인 동생 빼고 나, 누나, 형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얻어맞고 있었다. 평생을 통틀어 아버지에게 증오 섞인 욕을 들은 것은 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형의 고등학교 교과서가 내팽개쳐지고, 누나는 당장 학교 때려치우라는 소리를 들었다. 형은 교과서가 찢어지려는 것을 매달려 겨우 막고, 형제들은 동시에 모두 손이 닳도록 빌고 또 빌었다. 아버지가 학원에서 영어로 된 교재를 가지고 와서 영어 밑에 한글로 읽을 수 있게 써보라는 것을 나는 못 했다. 두 살 많은 누나도 못 했다. 나보다 네 살 많은 형도 못 했다. 아버지 입장에선 자식을 10년 넘게 가르쳤는데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한 거냐는 것이었다.

큰집 형의 도움을 받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국민학교를 졸업했다고 말하지만, 난 국민학교를 반타작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수업시간을 모른다. 공부하는 방식도.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글만 깨친 것 같다.
 
학교에 갔다 오면 아버지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교재를 외우고 있었다. 밥 먹을 때만 빼고, 보통은 잠자는 시간도 빼지만 난 아버지가 주무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30쪽 정도였던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외우신다. 그 영어교재는 콘크리트 전에 철근을 세우는 작업에 대한 자격시험용인 것으로 기억한다. 다섯 시간씩 공부하고, 한 번 오금을 펴고, 머리가 깨지는 것 같다던 아버지를 난 어른이 되어서도 생각한다.

내게 어려운 일이 생길 때, 궁지에 몰려서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기면 아버지의 30쪽을 떠올리곤 한다.
안다. 겁이 나서 외운 거다. 빚으로 집을 사고,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다. 큰돈을 빌려서 학원을 가는 거다. 아끼면 6개월, 아니 1년 농사지어 수확할 수 있는 쌀값을 팔아서 간 학원이고, 영어공부다.

눈이 아파 눈물을 훔치고, 머리가 아파 수건을 이마에 두르고, 온몸이 뻣뻣해질 때까지 자식들을 위해 참으신 거다. 가장이라서, 다른 거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차라리 술, 담배를 끊은 것은 아버지에겐 아무것도 아닌 거였다. 그 엄중한 세월에서 술, 담배는 일종의 사치였으니까. 아버지는 한 달 만에 자식들의 10년 영어공부를 따라잡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택시를 탔다. 신월3동에서 김포공항까지 그 멀고도 먼 공항이라는 데를. 그 귀하고 귀한 택시를 타고.
     
20개월쯤 지나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편지가 왔다. 아, 이런 민망하여라. 웬 남자가 팬티만 입고, 선글라스를 쓴 사진이 들어 있었다.
    
 
부인 보시오.
이곳은 4~50도의 날씨로 사람이 살 곳이 못 되지만, 이제 곧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지내고 있소.
돌아갈 때 시계하고, 라디오를 장만해 갈 테니 그리 아시오.
     
애들 아빠 보시오.
당신이 가족을 위하여 고생하는 것은 나도 알지만, 집살 때 땡겨 쓴 곗돈이 아직 8개월 남았고, 보통 월급 세 곱을 쳐주는 돈을 돌아와서 우리가 어디에서 벌겠소.
회사에 알아보니 남아서 현장 뒷정리할 사람을 구한다고 하니 당신이 남아서 그 일을 하시오.
애들은 밥 잘 먹고, 잘 지내니 걱정 마시오.

지은이 ㅣ 박명균

글 쓰는 과자장수. 건국 이래 아이들이 가장 많이 태어났다는 1970년, 전남 고흥군 두원면 대산부락에서 첫울음을 터뜨렸다. 집안에서는 ‘맹긴이’로 불렸다.

여덟 살 되던 해 서울로 이사와 신월동에서 골목대장 맹긴이로 살았다. 수많은 개띠 소년 중 하나로 특별할 거 없는 학창 시절을 보내다 신월중학교 3학년 때 『전태일 평전』을 읽고 삶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 후, 발산동 명덕고등학교로 진학했는데, 당시는 전교조가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문예반을 만들어서 교육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다가 무기정학을 받았다. 학교는 그만 다니고 싶었으나 부모님이 말려서 졸업은 했다. 그즈음 그동안 썼던 글을 모아 책을 냈다. 『친구야 세상이 희망차 보인다』(동녘, 1990).

대학 입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가방에는 교과서 대신 소설책이 두툼하게 들어 있었다. 그때 읽었던 천 권의 책과 고등학생운동을 하면서 만난 친구들과의 대화가 글의 밑천이었다. 졸업 후, 막노동을 2년 정도 하다가 군대를 다녀왔고, 다시 막노동하다가 결혼을 했다. 잠깐 직장을 알아보다가 친구의 권유로 시작한 과자 장사가 19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한편, 1990년 당시 ‘동녘 출판사’의 디딤돌 시리즈인 『불량제품들이 부르는 희망노래』(동녘, 1990),『이제 거진 어른인걸요』(동녘, 1990)의 주요 필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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