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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Oct 18. 2017

02. 제우스의 왕비 헤라

<신이 인간과 함께한 시절>



올림포스 산에 있던 헤라는 왠지 모를 초조함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얼른 일어나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니 다른 곳은 다 햇빛이 환한데 한 군데만 시커먼 안개로 덮여 있었다. 이건 안 봐도 뻔해, 예전에 나한테도 똑같이 써먹었던 수법이잖아! 분노에 찬 헤라는 즉시 몸을 날려 그곳으로 내려갔다. 안개가 걷히고 갑자기 헤라가 눈앞에 나타나자 당황한 제우스는 이오를 흰 암소로 변신시켰다. 

헤라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내색하지 않고 불쌍한 암소의 등을 쓰다듬으며 제우스와 누구네 집에 소가 한 마리 있는데 어떤 품종이더라는 등의 전원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치 영화 속에서 남편이 바람을 피우다가 아내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애인을 침대 밑에 숨겼는데, 아내는 침대에 앉아서 침대 커버 무늬가 어떻고 가격이 어떻고 그런 얘기를 시시콜콜 하는 것과 같은 장면이다. 마침내 얘기를 끝낸 헤라가 이 흰 소가 마음에 든다며 데려가겠다고 하자 제우스는 마음이 아팠지만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 가장 불쌍한 것은 이오였다. 그녀는 억울하다는 소리 한 번 못 지르고 얌전히 헤라의 손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헤라는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Argos)에게 암소를 감시하게 했다. 아르고스는 잠을 잘 때 두 개의 눈만 감고 나머지 98개의 눈은 모두 뜨고 있기 때문에 이오를 감시하는 데는 적격이었다. 이오는 감동적인 말로 아르고스를 설득하여 자신을 풀어 달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입을 열자 음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정처 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던 이오는 고향으로 돌아와 강변의 풀밭에서 아버지와 여동생을 만났다. 아버지는 이오의 등을 쓰다듬으며 풀을 한줌 뜯어 이오의 입에 넣어주었고 이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버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사람의 소리를 낼 수 없었던 이오는 답답한 마음에 발굽으로 땅에다 이름을 써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이를 본 이오의 아버지는 모든 사실을 알아챘고 비통한 마음을 금치 못했지만, 아르고스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매정하게 이오를 끌고 가버렸다.

제우스는 제아무리 강한 힘을 갖고 있어도 이런 경우에는 자칫하면 자신까지 다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대놓고 나서서 이오를 도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우스가 누구인가, 그는 아들인 전령의 신 헤르메스(로마신화의 메르쿠리우스)를 몰래 불러서 아르고스를 퇴치하라고 지시한다. 꾀가 많은 헤르메스는 일단 시링크스(팬파이프)를 연주하여 아르고스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서 갈대로 변한 시링크스(Syrinx)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어 아르고스를 잠재운 다음 잽싸게 칼을 빼 그의 머리를 몸통에서 잘라냈다. 아르고스의 백 개의 눈은 나중에 헤라의 상징인 공작새의 꽁지깃에 장식되었는데 오늘날에도 공작새의 깃털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메르쿠리우스(헤르메스)와 아르고스> 루벤스,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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