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Oct 31. 2017

02. 상대가 강하면 실리를 구하라.

<1인자의 인문학 한국편>



인조(우유부단한 1인자) vs 최명길(현실적인 2인자)

능양군은 보위에 오른 뒤 이귀와 김류를 일등공신에 올렸다. 그는 명분 없는 반정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남인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판단, 남인인 이원익에게 영의정을 맡겼다. 그러나 나머지 요직은 모두 서인이 차지했다. 김류가 병조판서를, 이귀가 이조참판을, 이서가 호조판서를 장악했다. 3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조선을 호령한 서인 정권이 시작된 것이다.

반정 세력은 반정의 명분을 살리기 위해 친명(親明)을 내걸었다. 하지만 이들이 후금을 멀리하는 배금(排金)을 한결같이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교섭을 계속하는 광해군 시기의 후금 대책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인조가 보위에 오른 지 5년 만에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국내에서는 ‘이괄의 난’이 벌어졌다. 이는 반정군의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김류가 거사 직전 정보가 누설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약속된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데서 시작했다. 그는 집에 머문 채 사태의 추이를 살폈다. 이때 결단력 있는 이괄이 임기응변으로 대장을 맡아 군사를 움직이자 김류가 황급히 합류했다. 이괄이 없었다면 거사에 가담한 자들 모두 역도로 몰려 일망타진될 상황이었다.

이괄은 논공행상에서 정사공신 2등에 녹훈돼 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당시 이괄은 내심 1등에 녹훈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2등에 녹훈되었고 커다란 불만을 품고 반역을 꾀했다. 이를 눈치챈 좌찬성 이귀가 그를 압송할 것을 요구했으나 인조는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괄은 충성스런 인물인데 어찌 반심을 품었겠는가. 경은 무엇으로 그가 반드시 반역하리라는 것을 아는가.”
“그가 반역을 모의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그의 아들 이전이 반역을 꾀한 것만은 잘 알고 있습니다. 어찌 그 아비가 이를 모를 리 있겠습니까?”

인조가 반박했다.
“만일 사람들이 경의 반역을 고발하면 내가 믿겠는가. 이괄의 일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대간들도 이귀를 좇아 이괄을 압송할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귀가 이괄을 제거하기 위해 배후에서 반역행위에 대한 고발을 사주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조는 이귀가 거듭 청하자 절충안을 취해 금부도사에게 이괄의 아들 이전을 잡아들이도록 명했다. 이 사실을 안 이괄이 크게 화를 냈다. 그는 마침내 자신과 함께 역모를 꾀한 혐의를 받고 있던 순변사 한명련과 함께 아들을 압송하러 온 금부도사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 1만여 명이 임진강 나루터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돌진하자 인조는 황망히 공주로 피했다. 이들은 19일 만에 도성을 점령했다. 선조의 아들 흥안군이 새로운 군주로 옹립됐다. 그러나 이들이 경성에 입성하자 장만이 이끄는 관군이 전열을 정비해 진격해왔다. 관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한 이괄과 한명련은 이천으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부하장수에게 살해되었다. 삼일천하였다. 이때 이괄의 일부 휘하 장졸이 후금으로 도주해 누르하치에게 인조의 ‘친명배금’ 정책을 고발하며 토벌을 청했다. 정묘호란의 불씨가 타오른 것이다.

그러나 보다 큰 이유는 명과의 전쟁으로 무역이 중단된 후금이 생필품 조달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1년 재정의 3분의 1에 달하는 막대한 양의 곡식을 보냈다. 후금에 대한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럼에도 인조와 공신 세력은 모문룡에 대한 지원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헤아리지 못했다. 누르하치에 이어 보위에 오른 홍타이지는 조선을 확실히 제압하고 중원으로 진공하려 했다.

마침내 홍타이지는 누르하치의 장례가 끝난 인조 5년에 휘하장수 아민에게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 조선을 칠 것을 명령했다. 아민의 군사는 의주성을 함락하고 여세를 몰아 순식간에 평양을 지나 황주까지 밀고 들어왔다. 인조는 이괄의 난으로 공주로 피난한 지 3년 만에 또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김상헌은 명나라에 사자로 가 있었다. 전란 소식을 접한 그는 곧 명나라 조정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명은 원숭환을 시켜 모문룡과 더불어 조선을 돕게 했다. 당시 평산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아민의 후금군은 홍수로 인해 임진강을 건널 엄두를 못 냈다. 척화파는 삼남의 군사를 결집해 명과 대응하면 후금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민도 이를 우려했다. 후금군이 더 이상 진격하지 않은 채 평산에 머물며 강화도로 사자를 보내 강화를 먼저 청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후금군이 머무는 평산은 강화도에서 불과 4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강화도를 지킬 군사와 식량이 턱없이 부족한 형편임에도 이들은 허울 좋은 명분론에 목을 매고 있었다. 후금군이 제시한 조건은 크게 세 가지였다. 모문룡이 소란을 일으키는 압록강 이남의 변경을 떼어주고, 모문룡을 압송하며 군사 1만 명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강화도 행궁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명분을 중시하는 김상헌의 척화파가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자 현실을 중시하는 주화파는 속내를 드러내지 못했다. 이때 최명길이 강화를 역설하고 나섰다. 이귀가 이를 지지하자 이내 강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척화파의 비난은 최명길에게 집중되었다.

“최명길은 화의를 자기의 책임으로 삼아 교활한 오랑캐를 믿을 만하다고 말하고 하찮은 무리를 친히 접견했습니다. 속히 그를 내쫓아 들끓는 여론을 진정시켜야 합니다.”

영화 <남한산성>, 최명길역 이병헌


그러나 최명길은 온갖 욕설을 무릅쓰고 평화협정을 성사시켰다. 명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해마다 목면 1만 5,000필을 바치는 선에서 타결됐다. 이른바 형제지맹(兄弟之盟)이었다. 후금에 보내는 공물이 결코 적은 양은 아니었으나 명나라 환관들이 요구하는 천문학적인 비용에 비하면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청군이 물러나자 인조도 한 달 뒤 환도했다. 온갖 비난과 수모를 무릅쓰고 나라와 주군을 위기에서 구한 최명길의 리더십이 빛나는 현장이었다.

형제지맹을 맺은 후금은 자신들이 가장 바라는 식량 조달이 원활히 이뤄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양국의 교역은 기대에 못 미쳤다. 이로 인해 인조 9년에 또다시 긴장이 조성됐다. 이듬해에 요동 일대를 공략한 후금은 조선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인조 12년에 들어와 전쟁에 쓸 배를 제공하거나 공물의 양을 늘리라는 국서가 전달됐다. 최명길은 이를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정 안팎에서 척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게 인 결과였다. 인조는 사자로 온 용골대와 마부대의 접견 요구조차 거절하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성균관 유생들은 후금의 사신을 참수하고 국서를 불태우라는 상소를 올렸다. 척화파들의 주장도 갈수록 강경해졌다.

인조는 이내 후금과의 결전을 굳히고 이를 알리는 선전문을 각지에 내려보냈다. ‘친명사대(親明事大)’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 후금과 절교한다는 내용이었다. 인조는 후금이 다시 침략하면 강화도로 피신할 생각을 했으나, 이 또한 후금이 수군을 확보한 상황에서 결코 안전한 전략은 아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01. 대 스핑크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