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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02. 2017

07. 인재를 발굴해 내치를 다져라.

<1인자의 인문학 한국편>



인조는 최명길의 헌의를 받고도 선조와 같은 강력한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결국 사대부가의 자제 모두가 환향녀를 내치고 새로 혼인을 성사시켰다. 군신의 어리석은 행보는 구렁텅이에 빠진 백성을 보듬기는커녕 대세에 안주해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인조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명분론에 함몰돼 백성을 짓밟는 데 일조한 사림세력 또한 비겁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최명길에 대한 인조의 신임은 돈독했다. 인조는 내심 명분론을 내세워 사태를 악화시킨 김상헌보다는 현실론에 근거해 사직을 보전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최명길을 높이 평가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영의정 자리에 올렸다. 최명길은 강토를 초토화하고 죄 없는 백성을 힘들게 만드느니 우선 적을 달래 사직과 민생의 안정을 이룬 뒤 후일을 도모하는게 낫다는 견해에서 강화에 나섰다. 그의 문집인 『지천집』에 나오는 다음 언급이 이를 뒷받침한다.
“외환은 맞서 대응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우선 인재를 발굴해 내치를 다지는 게 필요하다.”

그러면서 김상헌의 척화파는 왜란 때 은혜를 베푼 명을 버리고 청과 화친하는 것은 부모를 저버리는 패륜행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는 일반 사대부의 기본정서를 대변한 것이기도 했다. 이들의 의리론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의에 얽매여 나라와 백성의 존망과 직결된 대의를 망각한 것은 나라를 보살펴야 할 군신에게 필요한 리더십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인조 18년에 청이 조선에 원군 파견을 요청해왔다. 인조와 최명길은 안주목사로 있던 임경업을 주사상장(舟師上將)으로 파견해 수군 6,000명을 이끌고 가도록 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명나라 군사를 향해 발포도 하지 않고 일부 군사가 계획적으로 투항하는 등 오히려 청나라 진영을 교란에 빠뜨렸다. 얼마 후 임경업이 명군과 내통한 것이 발각돼 체포되었으나 탈출했다. 그는 청군이 북경을 점령하기 직전인 인조 21년에 명나라에 망명해명군의 총병이 되어 청나라를 공격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이로부터 3년 뒤에 좌의정 심기원의 모반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청나라에서 송환되어 인조의 신문을 받던 중 김자점의 밀명을 받은 형리에 의해 장살되고 말았다.

임경업이 명군과 내통했다는 보고를 접한 청태종은 크게 노해 사자를 의주로 보내 척화파의 괴수로 지목된 김상헌을 불러 심문하게 했다. 당초 청나라는 김상헌과 정온이 척화의 선봉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윤집과 오달제만을 끌고 갔다가 뒤늦게 김상헌이 시골에 은거하며 또다시 척화론을 주장해 여론을 주도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인조실록』에 이를 뒷받침하는 홍서봉의 글이 실려 있다.
“용골대가 다그쳐 묻기를, ‘산성에 들어갔다가 어가를 따르지 않은 채 그대로 시골로 내려가 관작을 제수해도 전혀 받지 않고, 세자가 떠나는 날 유독 참여하지 않고, 이후 척화의 상소를 함부로 올리도록 부추긴 자가 누구인가?’라고 했습니다. 신은 끝내 숨길 수 없겠다고 판단해 사실대로 대답했습니다. 그가 또 ‘김상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기에 신이 답하기를, ‘노병(老病)으로 안동에 물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명령키를, ‘조정에 보고하고 속히 오게 하라’고 했습니다.”

조정은 김상헌을 보내지 않으면 군대를 파견하겠다는 용골대의 협박에 겁이 나 곧바로 사람을 안동으로 파견해 그에게 상경할 것을 명령했다. 한 달 뒤 김상헌이 경성에 도착했다. 인조가 초구(모피로 만든 갖옷) 한 벌과 백금 500냥을 하사하며 그를 위로했다. 의주에 도착한 김상헌은 고향으로 내려간 배경을 묻는 말에 대답했다.
“당시 노병으로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병이 조금 낫고서 비로소 고향으로 간 것이다.”

궁색한 변명이었다. 용골대가 다시 물었다.
“청에 원군을 파견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비록 그러하기는 했으나 조정에서 듣지 않았다.”

국내에서 큰 목소리로 척화를 주장할 때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명분론에 충실해지려 했다면 자신이 그토록 역설했던 척화의 이유를 소상히 밝혀 용골대를 설복시키는 게 옳았다. 그와 달리 2년 뒤 몰래 임경업을 통해 명과 교신한 사실이 탄로 나 심양으로 끌려간 최명길은 시종 당당했다. 이를 두고 조정에서는 시치미를 떼거나 임경업에게 책임을 미루자는 의견이 우세했으나 그는 이를 단호히 반대했다.
“천하에 명분과 의리를 세우고자 하다가 죽고 사는 지경에 이르러 남에게 미룰 수는 없다.”

그러고는 자진해 심양으로 갔다. 그는 장례도구를 준비해가며 이같이 말했다.
“대신 한두 명이 죽어야 훗날 천하에 할 말이 있다.”

청에 도착한 그는 갖은 위협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이같이 대답했다.
“모든 것이 내 책임이다. 국왕과 다른 신료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다.”


영화 <남한산성> 최명길 스틸컷


그는 김상헌과 마찬가지로 청의 감옥에 구금되었다. 최명길은 왜 명과 은밀히 교신했던 것일까? 그는 영의정에 제수되고 김류, 김자점 등과 사이가 벌어져 인조 18년에 일단 물러났다가 2년 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이 와중에 그는 임경업의 소개로 알게 된 승려 독보를 명나라로 보내 비공식적인 외교통로를 유지했다. 이는 중원의 상황이 최후의 결전을 앞둔 매우 급한 상황으로 치달은 데 따른 대응책이었다.

당시 청군은 조선과 남쪽 명나라 사이에 늘 한선(漢船)이 드나드는 것을 보고 의심했으나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명나라 병부상서 홍승주가 투항하면서 조선이 명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승려 독보의 배후에 최명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문제가 불거진 것은 조선인 이계가 한선과 몰래 물건을 거래한 일이 발각된 이후였다. 명나라로 통하는 해상을 봉쇄하려 한 청국은 크게 화를 내며 이계를 잡아들여 내막을 추궁했다. 심문과정에서 이계가 실토하자 영의정으로 있던 최명길이 심양으로 소환됐고 김상헌과 함께 수용됐다.

두 사람은 벽을 사이에 두고 갇혔다. 그들은 함께 수용된 2년여 동안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최명길은 김상헌의 정의에 탄복했고, 김상헌도 최명길의 행보가 오직 조선을 위한 것임을 알고 감복했다고 한다. 『인조실록』에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심양관 관원의 치계가 나온다.
“용골대가 최명길과 김상헌을 불러놓고 황제의 명을 전하기를, ‘너희들은 모두 죽을죄가 있으나 크게 용서하는 은전을 베풀어 특별히 석방한다’라고 한 뒤 서쪽을 향해 황제의 명에 사례하게 했습니다. 최명길이 즉시 일어나 김상헌을 끌어당기며 함께 절을 하려고 하자 김상헌이 허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배례하지 않았습니다. 용골대의 재촉에도 끝내 움직이지 않자 최명길만이 4배하여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최명길이 김상헌을 끌어당겨 함께 절을 하려고 했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원래 최명길에게도 역시 김상헌 못지않게 강직한 면이 있었다. 그는 옳지 않다고 여길 때는 거침없이 바른말을 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가 거센 비난을 무릅쓰고 주화론을 편 것도 이런 강직한 성품에서 나온 것이었다.

군주와 백성의 안위보다 성리학의 천리에 입각한 절의와 지조를 더욱 중시했던 당시의 풍조에서 주화론을 펴는 것은 곧 스스로 역적임을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김상헌이 사대부들의 전폭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강력한 척화론을 펼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최명길은 나라의 안위와 백성들의 안녕을 걱정했다. 그의 눈에 조선의 사대부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반청숭명’의 명분론에 함몰돼있었다. 그가 당시의 여론을 등지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 이유다.

그러나 척화파는 군왕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안긴 이후에도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키는커녕 오히려 모든 책임을 최명길에게 뒤집어씌우면서 그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극단적인 명분론에 매달리는 소아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인조 말년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국가의 안위가 아닌 사리를 추구하려 주화론을 펼친 소인배로 몰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시 김상헌은 시종 지조를 굽히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미화되었다. 황당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더 놀라운 것은 잘못된 풍조가 조선 말기까지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조선이 민생을 도외시한 채 소모적인 논쟁에 휘말리며 국력을 소진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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