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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02. 2017

03. 형의 죽음

<꼬마 철학자>



7월의 어느 월요일이었다.

그날 학교가 파한 뒤에 정신없이 술래잡기 놀이를 하다 보니 막상 집에 돌아가려고 생각했을 때는 시간이 꽤 많이 흐른 뒤였다. 나는 책가방을 허리에 단단히 차고 모자를 입에 문채 테로광장에서부터 랑테른느거리까지 쉬지 않고 단숨에 달렸다. 그렇지만 평소에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어려워했던 나는 늦은 데 대한 핑곗거리를 찾아내기 위해서 집으로 올라가는 층계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런 다음 용기를 내어 벨을 눌렀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다.
“늦었구나!”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무의식중에 거짓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를 끌어당기더니 오랫동안 아무 말없이 안아주었다.

분명히 호된 꾸중을 들을 거라고 걱정했던 나는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생각은, 생니지에성당의 신부님이 저녁식사에 초대되어 집에 와 계신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이런 날에는 아버지가 절대 우리들을 야단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내 예상이 빗나갔다는 걸 알았다. 식탁 위에는 아버지와 내 접시만 동그마니 놓여있었다.

“엄마는 어디 계세요? 그리고 자크형은요?”
나는 놀라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평상시와 달리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엄마랑 자크는 형에게 갔단다, 다니엘. 큰형이 몹시 아프다는구나. 그래서…….”

내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본 아버지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쾌활한 말투로 덧붙였다.
“내 형이 몹시 아프다고 내가 말했니? 걱정할 것 없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뿐이니까. 실은 오늘 네 큰형이 병석에 누워 있다는 편지가 왔거든. 너도 엄마가 요즘 어떤지 잘 알지? 굳이 가보겠다고 해서 자크형을 딸려 보낸 거야. 어쨌거나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은 아니다……. 자, 이제 앉아서 식사를 하자꾸나. 나 배고파 죽겠다.”

나는 말없이 식탁에 앉았다. 그러나 큰형이 몹시 아프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터질 듯 아파서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기가 정말 힘들었다. 우리 두 사람은 아무 말없이 마주 보고 앉아서 우울하게 식사를 했다. 아버지는 정말 배고픈 사람처럼 급하게 음식을 먹더니 갑자기 손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충격을 받아 멍청해진 나는 식탁 끝에 꼼짝 않고 멀거니 앉아서 큰형이 공장에 와서 들려주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생각했다. 공장의 못을 건널 때면 신부복을 서슴지 않고 걷어올리던 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온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큰형이 처음으로 미사를 올리던 때도 생각났다. 부드럽고 정감 어린 목소리로 성경 구절을 읽으며 미사를 드리는 도중에 큰형이 두 팔을 벌리고 우리를 향해 돌아섰을 때, 그 멋진 모습에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했었다……. 그런데 그 형이 지금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병에 걸린 채 혼자 누워 있다니!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 때문에 나는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하느님이 너를 벌하신 거야. 이건 순전히 네 잘못이라구! 정직하게 행동해야 했어. 거짓말은 절대로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하느님이 나를 벌하기 위해 큰형을 죽게 할지도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고통과 절망에 빠져 이렇게 중얼거렸다.
“앞으로는 절대로 학교가 파한 뒤에 술래잡기 따위는 하지 않겠어요. 절대로요!”

식사가 끝나자 아버지는 램프에 불을 붙인 다음 일할 준비를 했다. 아버지는 먹다 남은 디저트 접시를 한쪽으로 밀쳐놓은 다음 식탁보 위에 두툼한 장부책을 올려놓고는 큰 소리로 계산을 시작했다. 바퀴벌레를 잡으라고 사들인 고양이 피네가 식탁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구슬프게 울었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창턱에 팔꿈치를 괴었다.


밖은 어두웠고, 공기는 무더웠다. 아래층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집 문 앞에서 이야기를 하며 웃는 소리, 멀리 로야스 요새에서 울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슬픈 생각을 하며 어둠 속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바람에 불현듯 창문에서 몸을 뗐다. 그리고 깜짝 놀라서 아버지를 바라보니 방금 나를 사로잡았던 불안과 두려움의 전율이 아버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아버지 역시 벨 소리를 듣자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아버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온 모양이다!”
“그냥 앉아계세요, 아버지. 제가 나가보겠어요.”

나는 문 쪽으로 뛰어나갔다.

누군가가 문턱에 서 있었다. 무언가를 내게 내미는 그 사람의 모습이 어둠 속에 힐끗 보였으나, 나는 그걸 받기가 망설여졌다. 그 사람이 말했다.
“전봅니다.”
“전보라고요? 무슨 일이죠?”
나는 떨리는 손으로 전보를 받아 쥐고 다시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문이 안 닫히도록 발을 갖다 댄 채 쌀쌀맞게 말했다.
“서명을 해야지.”

서명을 해야 한다고? 나는 전보를 처음 받아봤기 때문에 그런 사실은 아예 모르고 있었다.
“누구냐, 다니엘?”
아버지가 큰소리로 외쳤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버지! 그냥 불쌍한 사람이에요…….”
나는 전보를 전하러 온 사람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손짓하고 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하게 내 방으로 몰래 들어가서 급히 펜을 찾아 대충 잉크에 적신 다음 다시 나왔다.

“여기다 서명을 해라.”
그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층계를 밝히고 있는 희미한 램프 불빛을 받으며 떨리는 손으로 서명했다. 그러고는 문을 닫은 뒤 전보를 작업복 속에 감추고 다시 돌아왔다.

아! 그렇다. 나는 불행을 알리는 전보를 셔츠 속에 감춰두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전보를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직감적으로 그 전보가 무섭고 끔찍한 일을 우리에게 전해 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전보에는 과연 무슨 내용이 쓰여 있을까? 내가 짐작하고 있는 내용이 적혀있을까?

“거지라고?”
아버지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예, 거지였어요.”
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상하게 여길까 봐 다시 창가로 가서 팔꿈치를 괴었다. 

나는 나를 괴롭히는 그 전보를 가슴에 꼭 껴안은 채 아무 말없이 꼼짝 않고 얼마 동안 거기 그대로 머물러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치를 좇아 생각하려고, 용기를 가지려고 애쓰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네가 뭘 안다고 야단이야? 좋은 소식일지도 모르잖아. 큰형이다 나았다는 반가운 소식인지도…….’

그러나 결국 나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내가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보에 큰형이 나았다고 쓰여 있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나는 용기를 내서 전보 내용을 확인하기로 했다. 그래서 무표정하게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식당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내 방에 들어서자마자 손을 덜덜 떨면서 서둘러 램프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 죽음의 전보를 펼치는 순간, 내 손은 얼마나 바들바들 떨렸던가! 그리고 전보를 펼치는 순간, 내 눈에서는 얼마나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던가! 나는 전보 내용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읽고 또 읽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읽고 또 읽고, 심지어 이리저리 뒤집어 읽어보아도 소용없었다. 전보에 쓰인 말은 도저히 다른 말로 바뀌지 않았다.


장남 사망. 조의를 표합니다.

그렇게 펼쳐진 전보를 앞에 놓고 울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생각나는 건 오직 눈이 너무 많이 부어올라서 얼굴을 오랫동안 물에 담그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 저주스러운 전보를 떨리는 손에 든 채 식당으로 갔다.

자, 이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도대체 무슨 수를 써서 이 끔찍한 소식을 아버지에게 알릴 것인가? 이 전보 내용을 혼자만 알고 있으려고 했다니, 난 정말 얼마나 우습고 유치한 인간인가? 어차피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게 될 텐데! 난 정말 미친 짓을 한 것이었다. 차라리 전보가 왔을 때 직접 아버지에게 갖다 드렸다면 함께 전보를 읽었을 것이고, 지금쯤은 아버지도 다 알고 계셨을 텐데.

그런데 이렇게 혼자 이 생각 저 생각하다 보니 나는 어느덧 식탁에 다가가서 아버지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게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는 정리하던 장부를 덮고 펜의 깃털 끝으로 피네의 흰 주둥이를 간질이며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을 보자 내 가슴은 더욱 미어졌다. 아버지는 얼굴에 생기를 띠며 간간이 웃었다. 정말이지, 나는‘아버지, 웃지 마세요. 제발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슬픈 표정을 지은 채 손에 전보를 들고 그냥 자기를 쳐다보기만 하자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나와 아버지의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가 내 눈에서 뭘 보았는지 그건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건, 아버지 얼굴이 갑자기 심하게 일그러지더니 그가 가슴이 터져나갈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는 것뿐이다.
“형이 죽었구나, 그렇지?”

전보가 내 손가락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나는 엉엉 울면서 아버지 가슴에 쓰러졌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얼싸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동안 피네는 우리를 울게 만든 그 끔찍한 죽음의 전보를 갖고 장난을 치며 우리 발치에서 놀고 있었다.

이 일이 일어난 지도,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큰형이 땅속에 잠든 지도 꽤 오래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전보를 받으면‘장남 사망. 조의를 표합니다’라는 글을 또다시 읽게 될 것 같아 무서워 덜덜 떨면서 전보를 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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