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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02. 2017

07.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당신이 알지 못했던 걸작의 비밀>


무엇이 엘 그레코를 이토록 완벽하게 몰락시켰다가 20세기에 영광스럽게 부활하도록 만들었을까? 과거의 사람들이 보지 못한 무엇을 우리는 명백하게 보게 된 것일까? 엘 그레코의 걸작〈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은 오랫동안 대중과 전문가들에게 외면당했고 수백 년간 미술 안내서에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산토 토메 교회 밖에 이 그림을 보려는 열의와 호기심에 가득 찬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 작품은 스페인 톨레도의 가장 주요한 관광 상품이 되었다.


엘 그레코의 명성이 회복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이 그림이 묻혀 있던 긴 세월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엘 그레코의 부활은 스페인이나 그리스가 아니라 파리에서 이루어졌다. 1838년, 루브르 박물관은 새로 지은 전시관에서 스페인 거장들의 작품을 전시하기로 결정했다. 루이 필리프 왕은 스페인으로 사절을 보내 전시할 그림들을 구해 오도록 했다. 그 결과 9점의 엘 그레코 작품이 들어왔는데, 전시를 위해 확보된 총 450점의 그림들 속에서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엘 그레코는 이 전시에서 스페인 화파의 창시자로 소개되었지만 아직 완성이 덜 된 단계의 화가로 여겨졌다. 이탈리아에서 지오토나 두치오 같은 르네상스 이전 시대 화가들에게 자주 붙여지던 수식어와 비슷한 의미였다. 엘 그레코는 벨라스케스나 고야의 이전 단계의 화가로만 여겨졌기 때문에 수집가들은 그의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스페인 밖으로 나간 작품도 거의 없었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은 톨레도에 그대로 묻혀 있었다. 그 어떤 전문가도 그렇게 독특하고 심지어 기괴하다고까지 여겨지는 작품을 굳이 보러 가지 않았다.

낭만주의자들이 엘 그레코와 동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의 작품을 누구보다 좋아했을 것이다. 그들은 엘 그레코를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화가, 그리고 미쳐버린 화가로 분류했다. 낭만주의 정신에 입각해서 본다면 광기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의 상상력의 어두운 부분을 파고드는 것을 좋아했으며,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예술가일수록 더 높은 평가를 내렸다. 그들에게 엘 그레코는 광기로써 더 높은 수준의 예술을 성취한 매력적인 화가였다.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세월을 뛰어넘는 광기의 터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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