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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09. 2017

04. 투자와 소비, 두 얼굴의 박 선생

<백만장자와 함께한 배낭여행>



“나 돈 없어요.”

런던에서 파리로 넘어가는 유로스타를 타기 위해 우리는 세인트판크라스 역으로 갔다. 유로스타는 예약해놓았기 때문에 시간 여유가 좀 있었지만, 나는 바빴다. 런던에서 사용하던 오이스터 카드(교통 카드)의 카드 보증금을 환불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박 선생은 역에 내릴 때부터 런던에서 둘째 날 샀던 오이스터 카드의 보증금 환불에 관심을 가졌다.

“그 카드 보증금은 어디서 환불받나요? 한 10파운드 된다 그랬죠? 적은 돈이 아니네. 단디 챙기소.”

환불 못 받으면 큰일 날 것 같은 기세였다. 세인트판크라스 역과 연결된 킹스크로스 지하철역에서 1차 환불에 실패했다. 역무원들은 내 질문에 엄하게 티켓 자판기만 가리킬 뿐이었다. 아마 서툰 영어를 잘 못 알아듣겠고, 하여튼 내가 손에 오이스터 카드를 들고 있으니 충전을 하려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결국 나는 일단 물어물어 세인트판크라스 기차역으로 넘어와(바로 옆에 붙어 있다) 인포메이션 센터로 향했다. 하지만 기차역 내에 있는 두 곳의 인포메이션 센터는 오이스터 카드를 취급하지 않았다.

“저기 역 끝에 가면 방문객 센터가 있어. 거기 가면 바꿔줘. 위치는 니가 알아서 찾아.”

시큰둥한 역무원의 어중간한 안내를 들었을 때 나는 그만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다 옆을 보고 흠칫했다. 박 선생의 눈빛은 못 받으면 무슨 큰일이 날 듯한 표정이었다. 약 10파운드가량, 우리 돈으로 1만 3,000원이다. 서울이었으면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혼자 여행을 왔다면 그냥 오이스터 카드를 여행 기념으로 챙겨놓지 뭐,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하지만 선생과 함께라면 다르다. 환불을 못 받으면 점심을 굶어야 할지도 모른다. 농담 같지만 사실이다. 돈 하나하나를 꼼꼼하고 엄중하게 챙긴다. 결국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다시 일어나 투덜거리며 역 맞은편 끝에 있는 방문객 센터로 갔다.

다행히 친절한 안내원은 내가 받을 돈이 10파운드 말고도 1.8파운드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카드로 환불해주었다. 만세. 의기양양하게 선생에게 돌아와 영수증을 내보이며 말했다.

“1.8파운드나 더 받았어요.”

선생의 얼굴에 그제야 웃음기가 돌았다. 나는 그 미소를 보니 고생한 일이 생각나 퉁명스럽게 말했다.

“선생님은 돈도 많으면서 이런 푼돈에 그렇게 연연하세요?”
“나 돈 없어요.”
“…?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이 돈이 없다니요? 누가 들으면 욕해요.”

기가 막혀 하자 선생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말했다.

“투자할 돈은 꽤 있지요. 요모조모 생각해보고 나한테 꼭 필요한 돈은 아깝지 않아요. 그래서 강 국장님과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을 한 거고. 적은 돈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강 국장님이랑 함께 여행을 떠나는 데 드는 비용은 내게는 투자인 셈이죠. 여행을 함께하는 친구니까.”

선생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소비를 위해 쓸 돈은 없어요. 특히 귀찮다는 이유로, 잘 안 된다는 이유로 내다 버릴 돈은 없어요. 카드를 살 때 반납 시 카드 값 10파운드를 받기로 했으면 그건 받아야 하는 겁니다. 제아무리 부자라도 그런 돈 내다 버리면 장사 없어요. 그런 마음 자세라면 망합니다.”



순간 언젠가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한 책에서 읽었던 대목이 떠올랐다.

“첫 번째로, 먼저 자산과 부채의 차이를 알고, 자산을 사야만 한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이것만 알면 된다. 이것이 첫 번째 규칙이다. 그리고 유일한 규칙이다.”

선생은 자산을 사기 위한 돈에 있어서는 단위가 크다. 투자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좋은 기업을 발견하면 바로 그 기업을 분석한 뒤, 알토란 같다고 느끼면 “아내 팬티까지 팔아서”(선생의 표현이다!) 그 주식을 산다. 하지만 자산을 사는 돈이 아닌 경우에는 무척 검소하고 소박하다.

10여 년 전에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신문에 100억 주식 부자라는 기사를 보고서 부산으로 내려갔던 건데, 그때 선생이 집에 가서 저녁이나 먹고 가라고 권했더랬다. 100억 주식 부자의 집은 얼마나 근사할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따라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주 작은 아파트였고 선생과 나, 그리고 나와 동행한 일행까지 포함해 3명이 앉아 있기에 방이 비좁았다. 조금 있으니 인상 좋은 선생의 사모님이 된장찌개를 끓여 풋고추와 함께 내오셨다.

아마 그때 내 얼굴에 기대가 깨진 듯한 표정이 비쳤던 모양이다. 선생이 웃으며, 집이 너무 초라해서 놀랐냐고 물었다. 나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작아서 좀 놀랐다고 솔직히 말했다. 선생은 “집은 사는 곳이다. 과거에는 투자 가치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특히 아파트를 비싸게 사는 건 위험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파트에 전 재산을 다 담아놓고 심지어 빚까지 진다. 그러면 대단히 위험하다” 뭐, 그런 이야기를 들려줬었다. 선생이 구수한 사투리로 논리 정연하게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사모님이 내오신 된장찌개와 밥만 입에 밀어 넣는 수밖에 없었다. 근데 그 된장찌개는 정말 맛있었다.

잠시 그때를 생각하고 있을 때 선생이 덧붙였다.

“투자를 하면 그 돈이 새끼를 칩니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귀찮다는 이유로, 폼 난다는 이유로 돈을 써버리면 그 돈은 사라지지요. 강 국장님이야말로 그런 습관을 지금부터라도 들여야 해요. 늦었지만 가계부도 쓰세요. 물건 계산하고 나면 영수증을 꼭 받고요. 잘못 계산된 것은 없는지 세밀하게 들여다보세요. 괜히 호기 부리며 손해 보고 다니지 말고요. 이번에 여행 다니면서 내가 그것부터 훈련시켜 드려야겠네.”

참, 선생은 예나 지금이나 내 말문을 닫게 하는 한마디를 할 때가 있다. 그래도 애써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 덕에 좋은 것을 하나 배웠다. 아까는 정말 귀찮기도 하고 은근히 체면이 상하는 듯했는데, 덕분에 깨달음을 건졌달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선생이 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허름한 옷을 걸친 노파가 깡통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선생은 그 깡통에 내가 애써 받은 환불금만큼의 지폐를 그 안에 정성껏 넣었다.

돈에 대한 기묘한 양면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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