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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13. 2017

06. 언제나 간절해야 해요.

<백만장자와 함께한 배낭여행>



전화위복

배탈이 난 선생이 두어 시간 호텔방에서 뒹굴다가 비상약 한 알을 챙겨 먹고 잠깐 눈을 붙이자 정신이 좀 돌아오는 모양이다.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내일이면 파리를 떠나려 했기 때문에 파리 구경은 2시경까지 끝내고 일찌감치 호텔로 돌아온 것이었는데, 그만 점심때 먹은 우동이 조금 부담스러웠는지 저녁 식사까지 건너뛰어야 할 정도였던 것이다. 혈색이 조금 돌아온 선생이 말했다.

“강 국장님, 내려가서 우리 커피를 한 잔씩 합시다. 속이 너무 부대껴요.”

우리는 호텔 로비 커피숍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시키고 마주 앉았다. 그때 선생이 뜬금없이 한마디를 던졌다.

“강 국장님은 다른 작가들과는 좀 다르네요. 자존감은 크고 자존심은 잘 내려놓는 것 같아요. 내가 그동안 살펴본 게 틀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순간 귀에서 환희의 찬가가 울려 퍼지는 줄 알았다. 여행이 시작된 이래, 수없이 지청구만 들었지 ‘칭찬’이라고는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칭찬에 인색한 선생에게서 그런 얘기를 듣다니 말이다.

사실 사십 대 아저씨들은 사소한 칭찬에 약하다. 언제부터인가 책임과 의무는 막중해진다. 반면 이들이 이뤄내는 성과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다. 직장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냈고 연봉이 올라감에 따라 어느 정도의 성과는 당연히 내주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칭찬을 들을 기회보다는 욕을 먹는 경우가 많아진다. 집에서건 회사에서건 권리는 적어지고 의무와 책임은 막중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십 대 아저씨의 지갑을 열려면 ‘칭찬’을 해야 한다. 사십 대 아저씨는 옷가게 점원의 영혼 없는 칭찬에도 입이 찢어진다. 내가 간혹 생각지도 않았던 비싼 옷, 잘 안 어울리는 옷을 사들이게 되는 이유는 바로 칭찬의 힘 때문이라고 종종 생각하곤 했다.

나도 사십 대 아저씨가 된 지 5~6년 지났다. 칭찬에 배고플 수밖에 없다. 예전 태권도 도장의 사범님이 스쳐 지나가듯 내 지르기와 발차기에 대해 칭찬한 적이 있었다. 그 길로 태권도는 내 취미가 되어버렸다. 칭찬은 내게 그런 거다. 그러니 그런 와중에 날아온 선생의 칭찬은 여행의 여독을 확 풀어줄 만큼 즐거운 것이지 않았겠나.

나는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사 위원의 심사평을 듣는 참가자의 그 간절하고도 물기 어린 눈빛으로 선생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다. 그런 마음을 읽은 듯 선생이 덧붙였다.

“나는 지금 강 국장님의 심정이 어떤지 알아요. 뭔가 머릿속에서 심지가 타들어 가는 느낌일 겁니다. 자식 걱정, 부인 걱정, 한 가족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하는 가장이 무언가 새로운 출발을 하려 할 때면, 혀끝이 바싹 타들어 가고 심장을 누가 움켜쥐는 듯 가슴이 답답해지지요.”

맞다. 잠시 잊고 있었다. 나는 백수였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책임감과 불안함, 흔들림이 있다. 그 때문에 새벽녘에 몰래 집을 빠져나와 애꿎은 담배만 태워대던 때가 많았다. 대한민국의 사오십 대라면 누구나 언젠가 한 번은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단지 빠르고 느림만이 있을 뿐.

“그때 자존심이 강하면 형편에 안 맞게 허세를 부립니다. 새로 시작하는 사람이 허세를 부리면 잘될 수가 없어요. 세상이 그리 녹록지 않은 법이죠. 하지만 또 자존감이 없으면 사람이 망가질 수 있지요. 자그만 시련에도 금세 시든다고 할까요. 내가 요리사로, 또 음식점을 경영하면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자존심은 잘 내려놓고 자존감은 높은 사람들이 대부분 잘되었어요. 그런 면에서 강 국장님은 기초공사는 잘되어 있는 것 같네요.”

선생은 그러면서 당부하듯 말을 이었다.

“그런 기초공사가 되어 있는 사람은, 위기를 만나면 간절해지고 간절해지면 놀라운 무언가가 나오는 법입니다. 지금 강 국장님이 생각해야 할 것은 간절한 마음을 갖고 큰 꿈을 꾸는 겁니다. 그때 인생을 바꿀 무언가가 눈앞에 나타나거든요. 사람의 인생에서 도약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옵니다. ‘사업이 불같이 일어났다’고들 하잖아요. 그거 정말 맞는 말입니다. 기회를 잡을 때까지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잡으면 정말 불이 타오르듯 확 일어납니다. 그러니 언제나 간절해야 해요. 우연이랄까 기회랄까 그런 것이 눈앞을 스쳐 지나갈 때, 간절한 사람만이 그 기회를 움켜잡지요. 그래서 위기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간절한 마음을 갖고 큰 꿈을 꾼다, 그 얘기가 마음에 울림을 만들었다. 어쩌면 마흔 중반에 내게 닥친 위기가 좋은 기회로 다가올지 모르겠다는 근거 없는 안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우리 나가서 좀 걸을까요? 커피를 마시니 울렁대는 것은 좀 진정이 됐어요. 이제 걸으면서 소화를 더 잘 시켜야겠어요.”

선생이 산책을 제안했다. 뭔지 모를 가슴속 불길로 인해 뜨거워진 마음을 식히고 싶었다. 호텔을 나와서 두어 걸음 발길을 옮겼을 때 우리는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야간 조명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는 에펠탑이 눈앞에 우뚝 치솟아 있었던 것이다.

엊그제 에펠탑을 구경하러 갔다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곧장 들어와야만 했다. 그때 나는 에펠탑과의 인연은 그 정도라 생각했는데, 우연한 산책에서 이런 풍경을 만나다니 뜻밖이었다. 낮에는 기다리는 줄이 엄청나게 길어서 에펠탑에 오르는 것을 포기했는데, 지금은 놀랍게도 줄이 짧았다. 내친김에 우리는 에펠탑 내부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다지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그렇게 오른 에펠탑에서 내려다본 파리의 야경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갑작스런 복통이 가져다준 달콤한 우연이었다.

그래,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 살아보기 전에는. 부딪쳐보기 전에는 말이다.
인생의 하루하루 어떤 우여곡절이, 어떤 행복이, 어떤 아름다움이 놓여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인생은 전화위복. 그래서 재미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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