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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13. 2017

05. '대어'를 그만둔 이유

<백만장자와 함께한 배낭여행>


사람을 달아본다고요?

런던을 떠나기 하루 전 슈퍼마켓에 물과 라면을 사러 갔다. 선생은 저녁을 건너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유럽의 새벽에 한국 주식장이 열린다. 그러니 선생은 거리를 거닐다 돌아와서는 부리나케 씻고 이른 저녁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관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딱 그 시간에 나는 저녁밥을 챙겨야 한다. 놓치면 나는 덩달아 저녁을 굶게 된다. 그 전날이 그랬다. 또 굶을 수는 없었다. 유럽까지 와서 배를 곯을 수야 없지 않나. 선생이 저녁으로 라면을 제안했을 때, 냉큼 그러자고 했다. 안 그러면 또 속이 부글거린다고 끼니를 건너뛸지 모른다.

“먹는 음식이 바뀌니까 뱃속이 부글부글합니다. 이럴 땐 뭔가 라면 국물 같은 게 좋은데. 강 국장님, 우리 슈퍼에 가서 라면이 있나 한번 둘러봅시다.”

선생의 일명 ‘뱃속 종균론’이었다. 원래 김치와 된장을 먹는 한국 사람의 뱃속에 버터와 치즈가 잔뜩 든 서양 음식이 들어오니 적응을 못 하고 배가 부글거리고 가스가 찬다는 거였다.

그럴 정도로 런던 온 지 나흘 만에 버터와 치즈가 담뿍 뿌려진 서양 음식들은 우리의 입맛과 장 속 상태를 돌변시키고 있었다. 이런 불유쾌한 상황을 단 한 번에 진정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라면이다. 망설일 틈 없이 곧바로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한참을 뒤진 끝에 일본풍의 그림이 그려진 컵라면을 발견하고 계산대로 갔다. 그런데 계산대의 점원이 눈에 띄게 불친절했다. 앞에 서 있던 백인 남자에게는 상냥하게 잡담도 하며 계산을 해주던 아주머니는 내 차례가 되자 물건을 집어 던지듯 옮기고 표정에도 짜증이 가득했다. 계산을 마치고 내가 투덜거리자 선생이 말했다.

“그 점원이 손님을 달아서 그런 겁니다. 서비스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제일 나쁜 행태지요. 내가 일식집 ‘대어’를 그만둔 이유이기도 하고요.”


“사람을 달아본다고요?”

선생은 옛일을 회상하듯 우리 숙소가 있는 쪽 하늘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내가 ‘대어’를 차린 게 25살 때입니다. 그때 난 그런 결심을 했지요. 고관대작이 오든 노숙자가 오든 누구에게나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요. 생각해보세요. 형편이 넉넉지 않은 가족이 우리 식당에 와서 한 끼 식사하는 것은 그분들께는 무척 대단한 일입니다. 가족 누군가의 생일이거나 그 가정에 크게 축하할 일이 생겼거나 그런 경우지요. 그런 분들이 와서 흡족한 서비스를 받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가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보람이 있는지 몰라요. 흐뭇해서 돌아가는 손님의 뒷모습을 보면 내 마음이 부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대어’를 그만둔 이유랑 무슨 상관인가요?”
“한 10년 해서 가게가 번창하고 돈이 좀 모이니까 자꾸 사람을 달아보게 되더군요. 이 손님은 얼마치의 음식을 팔아주겠구나, 이 손님을 잘 접대하면 다른 손님들을 많이 새끼 치겠구나, 뭐 이런 거죠. 그게 사람을 달아보는 거예요. 그러면 서비스에 혼이 들어가지 않게 됩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그러면 가게가 내리막길을 걷게 되기 마련입니다. 최고의 식당이라는 명예를 다 잃고 난 뒤에야 식당을 접게 되지요. 난 그게 싫었어요. 그래서 그 길로 직원들에게 6개월 후에 식당을 접을 거라고 알렸지요. 그해 12월 30일까지 영업하고 31일에 청소를 마친 다음 깨끗이 손 털었습니다. 25여 년 바친 일이라 마음이 울컥울컥했지요. 하지만 잘한 결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어’의 손님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니까요.”

사람을 달아본다는 것,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자주 접할 수 있는 일이던가. 행색이 조금만 남루해도 깔보고, 거친 일을 하는 사람을 은연중에 멸시하지 않던가. 하지만 사람들은 금방 안다. 사람을 가려 영업하는 곳에는 두 번 다시 가지 않고 그 업소는 결국 문을 닫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런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을 달아보지 마라.”

그 말을 가슴에 새기는 사이 어느새 호텔에 닿았다. 드디어 라면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에 도착과 함께 물을 끓였다. 선생도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마침내 3분이 지났다. 선생은 허겁지겁 라면 한 젓가락을 입에 넣었다. 표정이 일그러졌다. 선생은 포크(젓가락을 깜박해서 호텔에서 포크를 빌렸다)를 내려놓더니 말했다.

“아까 배고프다고 했지요? 내 것도 많이 드세요. 갑자기 배가 부르네. 난 그만 씻고 잘게요. 아, 피곤하다.”
라면 맛은 짐작대로였다. 뭔가 어설픈 맛 가운데로 견디기 힘든 향신료의 향과 느끼함이 올라왔다. 선생은 타월을 챙겨 들고 샤워하러 들어가며 결정타를 날렸다.

“음식 남기면 벌 받습니다.”
“헉!”

김치 꿈을 꿀 것 같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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