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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17. 2017

09. 사람마다 다른 시계의 가치?

<백만장자와 함께한 배낭여행>


사람이 명품이 되는 거예요.

스위스의 인터라켄에 들어섰을 때부터 어딘가 기분이 좋아졌다. 융프라우에 오르기 위한 관광객들이 마치 전진 기지처럼 모여드는 곳이 인터라켄이다. 걸어서 도시 전체를 둘러볼 수 있을 것처럼 자그마한 이 스위스의 마을은 선생과 나를 단번에 매혹시켰다. 깨끗하고 정갈하면서도 풍경과 집들이 멋지게 어우러진 도시였다.

그렇게 걷기 힘들어하던 선생이 “좀 걸읍시다”라고 할 정도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호텔에 있자고 하실 분이 어쩐 일이냐, 이제 다리에 힘이 좀 붙으신 거냐, 그러다가 퍼지시는 거 아니냐, 내가 이렇게 종알종알 선생을 놀렸겠지만, 인터라켄에서만큼은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혹시라도 선생이 이 아름다운 도시를 빨리 떠나자고 할까 봐 조바심낼 만큼 멋진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풍경을 감싸는 그 청량한 공기도 놓치기 싫었다. 두말없이 선생을 따라 걸었다.

이 작은 도시는 관광 하나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 기꺼이 자신의 지갑을 열고 놀라운 경치에 홀린 듯 돈을 쓰고 가는 듯했다.

“도시 자체가 명품이네요.”

선생이 말했다. 명품. 그랬다. 이 도시는 마치 스위스 시계처럼 작지만 놀라운 가치를 가진 명품이었다.

마침 인터라켄 서쪽 주변에는 이름도 잘 못 들어본 수많은 명품 시계들을 파는 가게가 즐비했다. 산책하던 선생이 갑자기 그중 한 곳에 들어가 보자고 했다.

가게에 들어선 선생은 시계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시계를 가지려면 얼마가 있어야 할까요?”

그 시계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았다. 평상시 그런 고급 시계 가게에 들어가 본 적도 없고 가격을 물어본 적도 없었던 나로서는 난감한 질문이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글쎄요. 이런 시계에 관해서는 잘 몰라서요. 그래도 몇백만 원은 하겠죠?”

그러자 선생은 빙긋 웃더니 그곳에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을 불러 가격과 제품명을 물었다.

“손님, 이 제품은 억대입니다.”

‘아, 이게 그런 시계구나.’ 예전에 디스패치에서 지드래곤과 양현석 이 차는 시계가 억대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는데, 정말 집 한 채 값의 시계라니!

직원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뒤 선생과 나는 상점을 나왔다. 조금 걷다가 선생이 내게 다시 물었다.

“이제 저 시계를 가지려면 얼마나 필요한지 알겠어요?”
“1억 원이 넘는 돈이니 엄청나네요.”
“아뇨, 그것 가지곤 안 되지요.”

이건 무슨 소리인가. 뭐 따로 계산해야 할 세금이나 다른 비용이 있는 걸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으로 물었다. 선생이 말을 이었다.

“저런 시계는 차는 사람의 복장과 재산, 다른 장신구와 사는 집, 타는 차 등과 조화를 이루어야 제 가치를 드러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 시계를 차는 게 오히려 비아냥이나 조소의 대상이 됩니다. 대략 계산해볼까요? 저런 시계에 맞는 옷은 얼마나 할까요? 그리고 저런 시계를 차고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이 지하철을 타고 다닐까요? 그에 걸맞은 좋은 차가 필요하겠죠. 또 집도 무척 크고 좋아야 하지 않겠어요? 마지막으로 그런 조건들을 계속 유지해갈 수 있는 재력과 능력이 필요하겠죠. 대략 얼마쯤 드는지 짐작이 가요?”



내가 조금 빈정 상한 듯이 물었다.

“그 정도 능력 없는 사람은 평생 저런 시계 하나도 차지 못하란 법 있나요, 뭐?”

선생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아직 한참 멀었군요, 강 국장님. 누구나 좋은 시계를 찰 권리가 있죠. 아무도 그걸 막을 수 없고요. 난 강 국장님에게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한 게 아니에요. 다만 저런 비싼 물건들을 하나 사서 걸친다고 해서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솔직히 말해봅시다. 명품에 열광하는 이유가 뭐예요? 그게 정말 예쁘고 품질이 뛰어나서라고요? 천만의 말씀이죠.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뻐기기 위해서 아닌가요? 그런데 분수에 맞지 않는 명품은 그리 뻐길 만큼 멋져 보이지도 않는다는 얘길 하고 싶은 거예요.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왜 있잖아요. 무술영화 보고 나오는 아저씨들이 어깨에 힘 빡 주고 나오는 거 같은. 명품을 모르는 사람은 아까 그 시계를 차고 있어도 ‘한 몇십만 원 하나보다’라고 생각하겠지요. 또 명품을 아는 사람은 그 시계와 나머지 복장이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을 보고는 ‘무리해서 샀구나’ 하고 짐작할 겁니다. 아니면 가짜라고 생각하든지요. 그렇게 어느 누구에게도 좋아 보이지 않는 비싼 명품 시계나 명품 백을 걸치려고 얼마나 피 같은 돈을 낭비하나요. 그 돈으로 좋은 주식을 사고, 좋은 투자를 하면 큰 기회를 얻을 수도 있는데 말이죠. 그러다 집안 들어먹고 인생 망가질 수 있거든요. 욕망은 무서운 거니까요. 명품은 나중에 정말 여유가 있을 때 사서 걸쳐도 늦지 않는다는 거죠.”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에 나오는 보바리 부인이 그랬다. 상류층을 닮고 싶은 욕망이 결국은 그녀를 파멸로 이끌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란 욕망을 잠시 잠재우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곧 다시 욕망은 고개를 들고 마치 불가사리처럼 돈을 빨아들인다. 거기에 빨려 들어가면 삶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고 만다. 그래, 나도 그건 잘 알고 있다.

철이 들면서 명품 시계 하나 찼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 보이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또 주변 사람에게 박하게 굴면서 자신의 치장에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그리 멋지지 않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나이가 주는 혜택이다. 그러나 나는 왠지 모르게 조금 우울해졌다. 선생이 말을 덧붙였다.

“강 국장님, 진짜 중요한 건 사람이 명품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람들, 이름 자체가 명함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명품을 두르든 싸구려 옷을 입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사람이 명품이면 그 사람이 쓰고 입고 먹는 것은 저절로 명품이 됩니다. 명품을 살 만한 재력도 중요하지만 그에 걸맞은 매너와 인품, 지혜, 교양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나요. 그런 사람들이 걸친 명품은 비웃음의 대상이 될 뿐이에요.”

선생이 잠깐 숨을 골랐다.

“경제적인 능력은 중요합니다. 돈을 벌어서 아내와 자식을 부양해야 하는 것이 가장의 숙명이고요. 그런데 경제적인 능력은 돈을 좇는다고 만들어지지 않아요. 나는 장사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돈만 좇던 장사치들이 어떻게 쓰러져 갔는지 잘 알아요. 장사할 때 손님을 감동시키면 돈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그렇지 않고 장사할 때 돈만 좇으면 손님이 돈으로 보입니다. 어떻게든 지갑을 벗겨내려고 하죠. 지갑은 오직 감동한 사람만이 다시 엽니다. 세상 모든 일이 똑같습니다. 세상 모든 것 중에 장사가 아닌 것이 어디 있나요? 그렇다면 내가 파는 상품, 요리, 물건, 책 모두 그것을 사는 사람을 감동시켜야 해요. 그럴 때 돈이 쫓아오는 거예요. 여기 이 명품 도시인 인터라켄의 주민들을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 사람들 정말 대단하다. 이 명품 도시에 걸맞은 격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요. 그렇게 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매일매일 자신을 갈고닦아야 하는 거죠. 그게 명품을 관리하는 자세예요.”

돌아오는 길,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저 시계 가게에 가득 들어찬 시계들은 사실 하나도 부럽지 않다. 그러나 그런 시계들을 가질 만한 자격이 있는 명품 인생은 부럽다.’

가장 소박한 자연의 모습을 한 스위스의 인터라켄은 자신이 명품이라는 것을 입증하듯 한가운데 명품 시계들을 품고 있었다.

그런 인터라켄을 조금은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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