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Nov 23. 2017

03. 내가 세상을 바라볼 권리

<느리더라도 멈추지 마라>

당신은 바로 자기 자신의 창조자이다.
_앤드류 카네기

“아니, 무슨 옷을 그렇게 입었어?”

어느 날, 꽃무늬 셔츠를 입고 밖에 나오니 다들 한마디씩 했다. 어떤 이는 무슨 방송 출연하냐고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사실, 우스갯소리라 해도 은근히 말에 가시가 있다. 철들 나이가 지났는데도 옷 입는 게 마뜩잖다는 것이다.

욕먹는 게 좋은 사람은 없다.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욕이라곤 “철이 없어!”가 전부이지만, 이 또한 자꾸 듣는 게 그리 기분 좋지는 않다. 그래서 웃기는 소리로 철분이 듬뿍 들어 있는 피를 수혈받으면 된다고 썰렁한 농을 건네고 자리를 수습한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은 사라지지 않고 꽤 오랫동안 남아 있다.

철이 든다는 말이 사회에서 정해놓은 무슨 법률도 아닐 텐데, 이런 말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 물론 철이 든 행동, 즉 책임을 질 수 있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인간의 도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책임과 무관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도 안 주는 행동이나 생각마저 막는 게 과연 올바를까?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는 모든 사람을 통제하려는 사회가 그려진다. 정한 룰에 어긋나는 일은 상상도 못 하는 사회는 숨이 턱턱 막힌다. 이런 사회에서 내가 세상을 바라볼 권리는 없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고 또 행동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당연히 창의성은 환영받기는커녕 뭔가 불순한 것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창의성이라는 게 규칙을 깨는 것이니까 말이다.

규칙을 깨고 불규칙한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불안하다. 정해진 규칙의 패러다임을 깨는 것이니 대부분의 사람은 규칙을 깨기를 꺼린다. 두렵고 싫은 것이다. 익숙한 것이 좋다. 나 역시 예술을 공부하고 개그맨 활동을 했어도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여기서 ‘자유롭다’는 것은 뭔가 튀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튀거나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처럼 온갖 눈총과 구박을 받게 될 것이었다.

모두가 짬뽕을 시키는 마당에 혼자 짜장면을 찾는 사람은 눈치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기 일쑤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정서에 쉽게 반기를 들 수 없다. 학교, 직장, 군대등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쳐 가는 모든 곳에서 테두리 안의 생각을 강요받고 또 적응해야 한다.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뭔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틀린’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창의적인 것을 기대하려면, 익숙함의 개념이 조금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쭉 해오던 것에 대해 익숙한 게 아니라 다르다는 것에 대해 익숙해져야 한다.

내 아버지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 습관을 매우 중시하셨다. 해가 떴는데도 자리에 누워 있는 것은 게으름의 상징이었다. 일찍 일어나서 출근 혹은 등교를 하고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는 게 미덕이자 인생을 올바르게 사는 것으로 생각하셨다. 이런 아버지의 가치관이 잘못됐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올바르게 산다는 기준이 오로지 아침형 인간에만 맞춰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아침형 인간이 아닌 사람은 게으른 인간이라 하셨던 아버지의 눈에는 방송국 일 때문에 늘 늦게 일어나는 내가 못마땅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방송국에서는 아주 늦게 일정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저녁형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기준에 따르겠다고 아침형 인간으로 생활하면 방송생활에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다. 방송 스케줄에 맞춰 생활 패턴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저녁형 인간이 되어야 할 때도 있다.

타인의 시선에 맞춰 살아가는 것은 안정적인 삶일 수 있다. 대부분이 익숙해하고 바른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모나지 않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익숙함과 과감히 결별할 때 혁신과 창의가 가능해진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전복할 힘을 갖춘다면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다.



꽃무늬 옷을 좋아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차츰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게 됐다. 마흔에 가까워지면서 꽃무늬 셔츠나 꽃무늬 바지를 입는 것은 좀 아니지 싶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아침에 옷장에서 꺼낸 꽃무늬 옷을 들고 있다가 그리 튀지 않는 옷을 꺼내 입어본다. 그런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옷의 무채색만큼이나 내 마음도 칙칙한 듯 개운하지가 않다.

“이래가지곤 사람들 만나서 웃어도 입꼬리만 올라가는 꼴을 보여 주겠는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시무룩하다. 아침부터 이런 기분으로 출근을 하면 그날 하루가 좋을 리 없다. 그리 길지 않은 아침 출근 시간에 잠시 ‘멘탈’ 전쟁이 일어난다.

“뭐 어때. 나만 좋으면 된 거지. 기분 좋게 입고 출근하자!”

파블로 피카소는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법을 알려고 평생을 바쳤다고 한다. 어린아이는 익숙한 것보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그리고 어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달리 천진난만한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래서 때로 엉뚱하지만 기발하고, 어른들의 눈높이에서 볼 수 없지만 아이의 눈높이로 등잔 밑까지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때,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주변 사람들이 따가운 눈총을 보내더라도 좀 더 자유로워지자고 다짐한다.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막살자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씌워준 안경을 벗고 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내 삶의 주체가 되어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창조해나갈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01. 기억력스포츠대회의 기록과 랭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