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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27. 2017

06. 지나친 배려는 나를 바보로 만든다.

<느리더라도 멈추지 마라>



너는 어느 쪽 인생을 선택하겠느냐고 스무 살의 나에게 물었다면, 괴롭든 어떻든 뜨거운 인생을 선택하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_기타노 다케시


내가 하고 싶은 게 분명히 있는데 남 생각을 하느라 양보한다면 과연 그것을 배려라 할 수 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내 마음이 간절히 원하는데 친구가 원한다고 선뜻 양보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양보해야 할 만큼 그 친구가 간절히 원했다고 해도 내가 잃을 걸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우둔한 짓에 불과하다.

대학에서 한창 연기 공부를 하던 시절, 그때도 지금처럼 오디션 현장은 매우 치열했다. 저마다 주역을 비롯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한 역할을 따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나도 영화제에서 연기 대상을 받은 사람인 양 온몸으로 열정을 뿜어내며 오디션을 봤다. 그 덕분에 오디션에서 좋은 배역을 얻을 수 있었다.

예술과 연기에 몰두할 때이니 나로서는 좋은 기회가 왔고, 또 그 기회를 통해 한 번 더 도약해보자는 부푼 꿈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연기 연습을 하는 동안 주위의 눈빛이 그리 좋지 않아 마음고생을 꽤 할 수밖에 없었다.

“야, 너는 왜 이것밖에 못해? 좀 더 눈빛을 살리고, 대사에 감정을 실어봐!”
“네, 알겠습니다.”

연습 때마다 연출진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지적과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으니,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오디션에서 붙었는데, 많은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는커녕 지적만 당하고 있으니 연습하러 가는 길은 꼭 저승사자를 만나러 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결국 최악의 이야기를 듣고야 말았다.

“아무래도 배역을 바꾸는 게 어떻겠냐? 너도 너무 부담을 가지고 있어서 제대로 못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나의 어설픈 연기를 보다 못한 선배가 어렵사리 꺼낸 말이었다.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그 어떤 말보다도 날카롭게 내 가슴을 찔렀다.

“너 원래 연기 잘하잖아. 그런데 이번엔 주역이라 너무 부담을 느낀 모양이네. 아쉽지만 작품을 위해 네가 양보해라.”

위로의 말도 잊지 않았지만 그건 더는 주역의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이후로 여기저기서 배역 교체 의견이 나오면서 압박이 들어왔고, 나는 결국 배역을 바꾸기로 했다.

“그래, 생각 잘했어. 그리고 네가 그렇게 배려해주니 얼마나 좋아.”

주위에서는 내가 배역 교체를 받아들인 것을 배려라고 포장했다. 좋은 마음으로 주위를 배려했으니 고맙다며 칭찬까지 들었다. 그러나 나는 큰 상처를 받았다. 배려와 좋은 마음이라는 소리는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자 문제를 봉합하려는 미사여구에 불과하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당당히 오디션까지 통과해놓고도 끝까지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은 상당히 컸다. 애초부터 자격이 없었더라면 그토록 큰 상처를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디션에서 연기를 인정받았고, 나름대로 연기와 예술에 대한 열정도 있었다. 단지 좀 더 내가 맡은 배역에 몰입하는 과정이 더디게 걸렸을 뿐이다. 그런데 결국 외부적 압박에 의해 배역을 바꾸게 됐고, 그것이 배려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니 당혹스럽기만 했다.

당시 나는 연기에 푹 빠져 있었고, 또 연기를 통해 미래의 나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 열정이 모자랐던 것이 분명하다. 정녕 열정적이었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느라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나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야 하는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욕망을 채워주는 게 현명하다고는 볼 수 없다.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 진정 원하는 게 맞는지 성찰하며 거듭 숙고한다면 쉽게 포기할 수 없음이요, 절대 포기할 수 없음이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게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가?



열정이 뜨거워도 내 능력이 모자라다는 것을 깨달으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마무리하게 된다. 내가 아집에 빠져 객관적이지 못하는 바람에 주위의 누군가가 그것을 일깨워줬을 때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으니까. 그러나 미처 열정의 불씨를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 불씨를 남에게 넘기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내가 하고 싶은데 남을 생각해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은 내 미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 마음이 내키지 않는 어설픈 배려는 할 필요가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열정을 불태우는 게 오히려 배려일 수 있다. 내가 이렇게 할 수 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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