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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27. 2017

05.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면

<느리더라도 멈추지 마라>


모든 참사랑은 존경에 기초한다.
_G. 빌리어스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유관순 누나…….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초등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위인들이다. 그런데 한 조사에 따르면 기특하게도 존경하는 인물에 부모님도 포함되어 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 말고도 부모님이 존경의 대상에 뽑혔다는 것이 놀랍고도 흐뭇하다. 게다가 아이들이 부모님을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이유가 재미있다. 자신들을 보살펴주고 가르쳐주는 고마운 존재라서란다.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했을 뿐인데 존경한다니 아이들은 역시나 소박하고 순진한가 보다.

아이가 부모를 존경의 대상을 삼는 것은 고마움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낳아주고 키워주는 동안에 사랑으로 돌봐주는 부모님에 대한 감사함일 것이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는 말에 담긴 애정과 존경은 고단한 부모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는 청량제와 같다. 그나마 이런 존경도 품 안에 자식일 때나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춘기를 겪거나 먹고사는 일에 바빠지면 부모에 대한 존경심은 느낄 새도 없다.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학교 선생님이라는 이유만으로 존경을 받는다는 것도 요즘은 점점 보기 힘들다. 어떤 존재라는 것만으로 존경과 공경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시절은 지난 듯하다. 그만큼 존경받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피붙이나 선생님도 존경받는 게 어려운데, 사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대중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러니 무수한 사람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을 보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존경받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눈에 띄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직업, 나이, 성별, 재산 등이 각각 달라도 최선을 다한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감동을 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스스로 감동을 느낀다. 속된 말로 ‘자뻑’을 즐긴다는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하면서 성공과 실패를 겪는 동안 일희일비하지 않고 미래와 희망을 바라보며 동기부여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아직 이런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는 모자람이 많다. 그래서 어쭙잖게 존경의 대상이 되겠다고 설레발을 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존경의 대상이 되려고 노력한다. 명예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존경의 대상이 되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성숙해질 나 자신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나는 딸아이가 존경의 대상으로 삼고 싶은 아빠가 되는 게 꿈이다. 돈을 많이 버는 아빠, 부자 아빠가 되어 존경받고 싶은 마음은 없다. 존경받는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니까. 물질적인 풍요만으로는 부족하다. 돈보다 더 감동을 줄 그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마음속으로 나를 존경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까.



딸아이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려는 첫걸음은 내가 딸아이를 존중하는지를 따져보는 것이었다. 존경받는다는 것은 환심을 사는 것으로 이뤄질 수 없다. 용돈을 주고 선물을 안겨줄 때의 감사함과 존경은 다른 의미다. 존경을 받으려면 먼저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나는 내 아이를 과연 존중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봤다. 그냥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생각 말고는 딱히 존중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적은 없는 듯하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만 바라봤던 게 전부였다. 아이를 이해하는 것보다 아빠로서의 역할과 존재감을 먼저 내세웠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게 나의 존재 이유라는 것만 생각했다. 그동안 생각했던 가장의 역할이란 다름 아닌 열심히 돈을 벌어 가족부양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가장의 역할을 짊어진 아빠가 돈을 열심히 버는 것은 한때 미덕이었다. 물론 지금도 가뜩이나 어려워진 나라 경제 때문에 가장의 경제활동은 중요하다. 그러나 가족들이 받아들이는 정서는 조금 달라진 듯 보인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밖에서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부모님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존경스러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당연한 의무이자 역할로 여길 뿐, 밖에서 일하는 것에만 매달리는 부모와의 단절이 더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어쩌다 함께 모여 밥이라도 먹을라치면 저마다 스마트폰을 꺼내 든다. 어느덧 대화가 사라진 삭막한 집안 풍경은 이제 그리 별스런 일도 아니다. 부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이들이 못마땅하고, 아이들은 잔소리만 잔뜩 늘어놓는 부모가 못마땅하다. 그러니 가급적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존중과 존경의 감정은커녕 사랑의 감정도 느낄 수가 없다. 서로의 존재감을 느끼고 애정과 존경의 감정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피붙이라는 말의 의미 그대로 상호 감정과 소통이 연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속속들이 잘 아는 사이인 가족이라서 존중하고 존경하는 게 더 어렵다. 그저 가족이니 눈감아 주고 한숨만 내쉴 뿐이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안팎에서 일관된 말과 행동을 보여야 한다. 밖에서는 친절하고 매너가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 집에서는 무뚝뚝하고 다소 폭력적인 경우도 있다. 안팎이 같은 사람이 되려는 것, 그 노력은 앞서 딸이 나를 존경하는 것보다 내가 아이를 존중하는지 따져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상대를 고치고 이끌려는 게 아니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내가 존경받을 수 있는 첫걸음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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