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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Dec 12. 2017

04. 파리도 찾지 않는 유도장

<잘 넘어지는 연습>



운동선수들에겐 세상이 저마다의 크기로 존재한다. 피겨선수들의 세상은 빙상만 하고, 육상선수들의 세상은 400미터 트랙만 하다. 유도선수들의 세상은 세 평 남짓한 유도장만 하다. 그곳은 아주 좁고, 또 외로운 공간이다. 그곳에 들어서면 믿을 건 오직 내 몸뚱이 하나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내가 밟고 있는 그 세상이 조금 더 넓어지면 좀 더 자유로워지고, 좀 더 여유로워지고, 어쨌든 좀 더 좋아질 줄 알았다. 어쩌면 남들보다 훨씬 빠른 나이에 은퇴를 택한 이유도 그것인지 모른다. 더 넓은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은 욕심, 세 평을 넘어보겠다는 의지가 태어나서 유도 말고는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는 나를 경기장 밖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마침내 세 평을 벗어났을 때, 처음엔 설레었다. 그다음엔 두려웠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으로 바뀌는 건, 정말이지 순식간이었다. ‘이번 판은 죽은 건가?’ 싶은 아찔한 생각도 들었다. (은퇴를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인데 말이다.)

단 하루도 다음 날을 쉽사리 예측할 수 없었다. 설사 예측해도 매번 빗나가기 일쑤였다. 반짝했던 유명세 때문에 유명인의 통과의례(?)라는 사기도 당해보고 호기롭게 차린 유도장에는 파리 한 마리 날아들지 않았다. 대단한 사업수완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올림픽 메달리스트라는 타이틀만 믿고 판교에 위치한 건물 지하에 덜컥 유도장을 차린 것이 문제였다. 유도로 이름을 좀 날렸으니 유도장을 하면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올 거라고, 아니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어떻게든 굴러갈 줄 알았던 유도장은 8개월 내내 적자를 면치 못했다.

사진: mbc 나혼자산다 캡처


‘옆 동네 왕기춘네 유도장은 벌써 2호점을 연다고 고사를 지내던데. 이게 금메달과 동메달의 차이인가? 삶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애써 담담한 척하려고 해도 잘되지 않았다. 나 혼자라면 이것도 경험이지 하고 툴툴 털고 일어날 텐데, 나 외에도 함께하는 사범들이 있고 식솔이 생기자 전에 없던 조바심이 났다. 한산한 유도장에 하릴없이 매일 나가자니 고역도, 그런 고역이 없었다. 하루에 많으면 세 명, 적으면 한 명의 학생이 오다 보니 학생보다 선생이 많은 ‘우수한 교육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때 우리 유도장을 다닌 사람들은 전 국가대표들의 일대일 특훈을 받는 행운(?)을 누렸다.

아무도 내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니, 오히려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운동선수 시절에는 언제나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정해져 있었다. ‘내일 뭐 하지?’라고 고민할 필요 없이 주어진 일정을 소화하기만 하면 되는 삶이었다.

아주 가끔 내가 스스로 박차고 나온 세 평짜리 세상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래도 그곳에는 ‘3분만 버티면 된다’는 분명한 끝이 있었는데. 아무리 강한 상대를 만나도 결국 우리 모두 가진 것은 두 팔다리뿐이니까 어떻게든 해볼 만하다는 객기도 있었는데. 좀 좁고 외로웠어도 그곳에 서면 나도 모르게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곤 했었는데. 훈련할 때는 그렇게 떠지지 않던 눈이 텅 빈 유도장 바닥에서 잠든 날엔 동이 트기도 전에 번뜩 떠졌다. 일찍 일어나봤자 할 일도 없는데 말이다. 그때만큼 하루가 길었던 때가 또 있을까 싶다.

물론 후회하지는 않았다. 유도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것은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었으니까. 딱 거기까지가 유도선수로서 내가 살아내야 할 삶임을 본능적으로 알았으니까. 다만 생각해봤다. 정해진 시간도, 정해진 공간도 없는 이 망망대해 같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힌트를 내가 평생 살아온 세 평, 아니 정확히는 2.72평짜리 세상에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땐 그랬지 하고 추억하다 보면 지금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지 하고 박차고 일어날 용기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유도장을 열고 처음으로 ‘자격’이라는 것에 대해 깊게 고민하게 되었다. 유도를 하면서 국가대표 자격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만큼 이 유도장을 운영할 자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던가? 유도를 잘하고 싶어서 10년 넘도록 노력하고도 제일 잘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는데, 별다른 준비 없이 도장을 차려놓고 유도를 가르쳐보겠다고 나선 스스로가 ‘얼척 없게’ 느껴졌다.

‘뭐가 이렇게 건방져’라는 생각에 절로 부끄러웠다. 철판이 꽤 두꺼운 편인데도 말이다. 유도장을 열고부터 머릿속에는 온통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많이 모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만 맴돌았다. 여기저기 전단지를 붙였고 방송에서도 어떻게 유도장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끼워 넣을지에만 머리를 썼다.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친 채 말이다. 이대로라면 사람들이 몰려와도 문제였다. 전단지 돌리는 일을 멈췄다. 유도장 이야기도 묻지 않으면 먼저 꺼내지 않았다.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왜 유도장을 차려야 하는가? 나는 사범으로서 자격이 충분한가? 내가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는 유도가 따로 있는가?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또 혼자서 찾을 수 있는 답도 아니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갔다.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자는 생각이었다. 유도 불모지에서 도장을 열어 낯선 운동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만나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아버지가 나와 준현이에게 유도를 가르칠 때 그러셨던 것처럼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누구든 만났다. 수없이 쏟아지는 조언 중에 좋은 건 새겨듣고 나쁜 건 흘려듣는 것도 일이었다. 도장 간판에 내 이름을 걸라는 말보다는 운동 프로그램을 보고 도장을 찾게 하라는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조준호 유도장’이라는 낯간지러운 간판을 달지 않은 건 지금도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덕에 내실을 다져야겠다는 각오를 더욱 확고히 세울 수 있었다.

처음 유도장을 차리고 고전을 면치 못했던 이유는 배움이라는 나만의 강점을 잠시 잊었던 탓이리라. 다행히 곧 정신을 차리고 여러 유도장을 찾아다니며 배운 끝에 틀어진 방향을 바로잡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도장 수익이 바로 좋아진 것은 아니지만 나를 옥죄던 조급함은 사라졌다. 그때부터 천천히 내가 생각하는 유도장의 모습을 그리고 실현시켜갈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호기롭게 은퇴하고 유도장을 차릴 때 나는 많이 조급했던 것 같다. 내가 은퇴한 운동선수 신분이 됐을 때 사람들이 보낸 동정과 걱정의 눈빛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 안정적으로 지속해오던 일을 그만두는 것은 나의 소신 있는 선택이기 이전에 제 기능을 다 해 재활용도 어려운 재료로 낙인찍히는 일이었다. 그 찝찝한 동정과 씁쓸한 걱정들은 나를 자꾸만 실패자로, 중간에 포기한 나약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에게 ‘그리고’의 시간을 주지 못했다.

넘어진 다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넘어지자마자 벌떡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잠깐은 창피함을 견뎌야 하고, 상처를 살펴야 하며, 가빠진 호흡을 골라야 한다. 그래야 잘 일어날 수 있다. 유도에서도 낙법을 친 다음에 벌떡 일어나지 않는다.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천천히 일어나 도복을 단정하게 정리한다. 그래서 ‘잘 넘어지는 일’과 ‘잘 일어서는 일’ 사이에는 ‘그리고’가 필요하다.

‘그리고’는 넘어져서 입은 상처와 통증을 찬찬히 바라볼 여유다. 왜 넘어졌는지에 대한, 다시 넘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다. 일어서서 무엇을 할지에 대한 계획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이런 걸까. 막연하게 될 거라고 믿었던 일이 잘되지 않을 때, 지름길을 찾는 대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여유를 지니는 것. 어른이 된다는 건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책임을 지는 거라고, 짊어진 책임의 무게가 나의 다섯 곱절은 되는 우리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고작 하나의 책임을 짊어진 지금도 이렇게 어깨가 무거운데……. 새삼 이 세상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가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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