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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Dec 13. 2017

05. 행복의 조건 (마지막 회)

<잘 넘어지는 연습>


초등학교 때만 해도 취미로 유도를 배웠다. 당시 내가 다니던 도장의 관장님은 추운 겨울에도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훈련을 시켰다. 매서운 찬바람에 매트가 금세 시멘트 바닥처럼 딱딱해져서 넘어지면 정말 아팠다. 맷집을 키우겠다는 의도였는지 모르겠지만 어린 마음에 아픈 것이 너무 싫어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곤 했다. 이기려는 승부욕보다 다치지 않으려는 생존력으로 버텼다고 할까? 그때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승부욕보다 생존력이 강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배웠는지도 모른다.

5학년이 되었을 때 유도를 배운 지 6개월 만에 첫 시합에 출전하게 되었다. 잘하는 선수들은 모두 빠진 2진 대회였지만, 어쨌든 그 대회에서 1등을 했다. 처음 맛본 성취감에 흠뻑 취한 나는 이후 학교 계단을 오르내리며 전국 제패의 꿈을 키웠다. 당시 《슬램덩크》 같은 스포츠 만화에 한창 빠져 있던 나는 주인공 강백호처럼 까까머리를 하고 ‘전국 제패!’를 입버릇처럼 달고 지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내가 퍽 귀여웠던 것 같다. 고놈, 참!)

고등학교 1학년 말, 꿈이 이루어졌다. 당시 62~3킬로그램 정도 나가던 체중을 3킬로그램 정도 감량하고 60킬로그램급으로 출전했다. 체급을 낮추자 적수가 거의 없었다. 고등부 첫 전국대회 1등이었다. 학교에서는 플래카드까지 내걸었다. 사기 진작을 위해 선수들에게 매 끼니 삶은 달걀을 무한 지급하겠다는 다소 뜬금없는 공약도 내걸었다. 우리가 식품영양학을 아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달걀흰자가 근육을 붙이는 데 좋다고 하니 와구와구 먹었던 기억이 난다.

전국대회 결과에 잔뜩 고무된 나는 동계훈련 때는 하루에 달걀을 60개까지 먹어치웠다. 결과는 ‘정직’했다. 신학기가 시작될 무렵 근육으로만 거의 6~8킬로그램이 불어 있었다. 체중계에 올라가보니 몸무게가 70킬로그램에 육박했다. 그제야 ‘아, 근데 난 60킬로그램급에 나가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육을 붙일 생각에 운동선수의 기본인 체중 조절은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체급을 높이기에는 신장이나 체력이 부족했다. 게다가 내가 체급을 바꾸면 60킬로그램급 선수 없이 단체전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마음대로 체급을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별수 있나. 이번엔 체중을 줄이기 위해 식단 조절에 돌입했다. 남들이 밥 먹는 시간의 두 배를 들여 천천히 음식을 먹었고 영양소가 파괴된다고 해서 소금은 금지되었다. 맹맹한 음식을 먹는 게 고역이었지만, 그래도 버텼다. 결국 체중은 다시 60킬로그램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합에서 연속으로 입상하지 못했다. 1학년 말에는 적수가 없는 1등이었는데 무리한 체중 감량으로 인해 실력도 함께 빠져나갔는지 평범 이하의 선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 체중이 조금이라도 늘까봐 신경 쓰느라 운동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살이 찌진 않았는지 체크하기 위해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맨살을 만지는 버릇이 생길 정도였다. 유도선수가 아니라 다이어트 선수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다이어트! 그놈의 다이어트!

다이어트는 운동선수들이 치를 떠는 단어다. 건강을 위한 체중 감량이 아니라 건강을 망치는 체중 감량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걸 대회 때마다 반복한다. “다시 태어나도 유도할래?”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 건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나 시합 때의 중압감과 긴장감 때문이 아니라 체중 감량 때문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극한의 허기를 참는 일은 정말 상상 이상의 고통이다.

결국 코치님에게 체급을 올리겠다고 말했다. 돌아온 대답은 당연히 “안 돼”였다. 코치님은 체급별 머릿수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지금 체급에서 열심히 하면 올림픽에도 나갈 수 있는 훌륭한 선수가 될 거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린 내게 그 말이 들릴 리 만무했다. 나는 유도를 하지 않겠다는 배수의 진까지 쳤다.

이유는 간단했다. 더 이상 유도가 행복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유도 시합에 나가는 일 자체가 즐거웠다면 체중 조절에 매진하면서부터는 시합에 나가도 ‘끝나면 뭘 먹지?’ 하는 생각만 했다. 누구를 위한 시합인지 의문도 들었다. ‘학교 단체전의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유도를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자 유도라는 운동 자체에 환멸까지 느낄 것 같았다.

결국 우기고 우겨서 60킬로그램급에서 66킬로그램급으로 체급을 올렸다. 처음에는 같은 체급의 다른 선수들에 비해 신장도 딸리고 힘도 딸려서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부족한 게 있으니까, 나란 사람은 또 머리를 쓰더라. 그때부터 ‘유도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상대의 힘을 상쇄시킬 건지, 상대의 힘을 이용할 건지 등 상대와의 상황에 맞춰 전략을 짰다. 또 체급과 힘이 아니라 근지구력을 이용한 나만의 유도 기술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이어터에서 유도선수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2학년 말이 되자 전국대회에서 2등을 했고 3학년 때는 1등을 거머쥐면서 다시 페이스를 찾았다. 그렇게 나는 결국 행복하게 운동할 수 있는 길을 찾아냈고 그 길에서 소기의 성과도 거뒀다.

내가 유도장을 차리고 여러 고민과 배움 끝에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유도’를 지향하게 된 데는 과거의 경험도 한몫을 했다. 유도 자체가 즐겁고 행복해야만 유도를 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았던 나는 아이들에게 경쟁이 아니라 함께하는 의미의 스포츠, 승패가 갈리는 경쟁이 아니라 다 함께 즐거운 유도를 가르쳐주고 싶었다.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선수를 기르기 위한 도장이 아니라 인간을 키워내기 위한 도장을 꾸리고 싶었다.

유도에서 넘긴 사람이 승자고 넘어간 사람이 패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다 함께 즐겁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설사 승패선언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승패의 구조를 알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한 사람은 패배감을, 한 사람은 성취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유도의 룰을 익히기 전의 아이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아이들에게 유도는 승부나 시합이 아니라 그저 놀이다. 누가 넘기고 누가 넘겨졌든 다 같이 재미있게 놀았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유도의 기술이나 방법은 알려주지만 승패의 법칙은 알려주지 않는다. 두 명이 경기를 하면 두 명 모두 칭찬한다. 넘긴 아이에게는 “가르쳐준 기술을 제대로 익혔네? 방금 아주 멋있었어!”라고 칭찬하고 넘어간 아이에게는 “우와, 방금 아프지 않게 잘 넘어졌네. 낙법을 배우니까 넘어져도 괜찮지?”라고 칭찬한다.

누차 말했듯이 유도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넘기는 기술이 아니라 넘어지는 방법이다. 그러니 넘기는 기술을 잘 익힌 아이와 마찬가지로 넘어지는 방법을 제대로 배운 아이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렇게 유도를 배운 아이들은 ‘누군가는 지고 누군가는 이기는 게임이라면 내가 이겨야겠다’는 경쟁심이 아니라 ‘공평한 룰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며 함께 어우러지는’ 사회성을 기를 수 있다.

2017년 2월, UC버클리로 유도 세미나를 하러 가면서 미국에서는 어떻게 유도 도장을 운영하고 있는지 또 한 번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가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이들을 어떻게 칭찬해야 하는지’였다. 10년째 아이들에게 운동을 가르치고 있는 마스터 한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교육하기 힘들어하는 4~5세 아이들을 가르칠 때가 가장 재미있고 신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5분만 주면 어떤 아이든 원하는 방향으로 교육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5분? 고작 5분만으로 어떻게?’

미심쩍어하는 내 표정을 눈치챘는지, 그가 웃으며 설명했다.
“교육 시간이 길어진다고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물론 5분이 뭔가를 가르쳐주기엔 당연히 짧은 시간이죠. 중요한 건 그 5분 동안 아이가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스위치’를 켜는 겁니다. 그리고 그 스위치를 켜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바로 칭찬입니다.”

‘에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뭐, 이런 뻔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뻔하디뻔한 이야기 같아 질문을 멈췄다. 그러자 마스터 한은 우리를 자신의 도장으로 데려갔다. 눈앞에서 그가 천방지축인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 전까지의 의심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는 처음 만난 아이에게 이름을 묻는 동시에 칭찬을 시작했다. “정말 멋진 이름을 가졌구나!” 하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어서 그가 가리킨 포인트에 아이가 쭈뼛쭈뼛 서자 “너처럼 잘 서는 아이는 처음이야! 또 누가 잘 서는지 볼까?”라며 주변의 아이들을 격려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주어진 포인트에 서더니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고성과 체벌이 전혀 없었고 오로지 칭찬만이 가득했다. 게다가 칭찬의 언어도 휘황찬란했다. 같은 동작을 해도 누군가에게는 “멋지다”, 누군가에게는 “베스트”, 누군가에게는 “굿잡”이라고 이야기했다.
“획일적인 칭찬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마음을 담지 않은 기계적인 칭찬은 아이들도 금방 눈치채니까요. 칭찬의 언어를 50개 정도는 마련해두는 게 좋습니다.”

조금만 실수하면 꾸중을 듣고 남들과 다르게 하면 틀렸다고 손가락질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해낸 일에 대해 그 나름의 칭찬을 들은 아이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보다 도전에 대한 자신감을 키울 수 있다. 그렇게 누구도 상처받거나 주눅들지 않고 각자 자신만의 유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성공의 비밀을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기계발서를 읽고, 유튜브를 통해 유명인들의 강의를 보고, 성공했다는 사람들을 만나 조언을 듣는다. 매체가 무엇이든 전달하는 메시지는 비슷비슷하다. 안 되면 되게 하고, 한눈팔지 말고 정진해야 하며, 물러설 곳이 없도록 배수의 진을 쳐야만 성공에 도달할 수 있단다.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하루 18시간 몰입해야 한다는 천편일률적인 법칙이 마치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내가 은퇴를 고민할 때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던 “한 우물을 파야 성공한다”. 글쎄, 분명 틀린 말은 아닌데도 가슴 한구석이 막막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사실은 기분 탓이 아니라 시대 탓이다. 안타깝게도 어느새 시대가 변했다. 이제 우리 생체시계보다 기술 발전의 주기가 곱절의 곱절로 빠른 시대가 되었다. 휴대전화 약정은 2년이지만 신기종은 일 년에 한 번씩 나온다. 무엇 하나 제대로 마스터하기도 전에 새로운 기술이 나와 옛 기술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1만 시간을 투자해서 전문가가 되었더니 그 분야가 기계로 대체되는 일이 빈번하다. 앞으로 그런 일이 더욱 흔하게 벌어질 것이다. 평생 직장을 찾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던 전 세대와 달리 이제 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들은 향후 열 번 정도 직업을 바꿀 거라고 한다. 그만큼 세상은 배우기 무섭게 바뀌어간다.

이런 세상에서 한 우물만 파는 것만큼 위험한 모험은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 한 우물만 파다보면 자기 무덤 파기 십상이다. 한 길을 우직하게 걸어가는 끈기만큼이나 이 길이 아니다 싶을 때 빨리 발을 뺄 수 있는 용기, 다른 일에 거침없이 도전하는 패기, 실패해도 훌훌 털고 일어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한 우물만 파야 성공한다는 말이 옛말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정답은 무엇일까?

이제 모두에게 통하는 절대적인 성공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각자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관이 필요하다. 주관은 세상의 수많은 잣대들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자 이런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가치다. 사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행복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서 불행한 경우가 더 많다. 자신이 정의 내린 행복의 조건과 요소들이 뚜렷하다면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손쉽게 쟁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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