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궤도를 향한 도전

<XPRIZE 우주여행의 시작>

by 더굿북
%E9%87%89%EB%9A%AE%EC%9C%B4%E7%A7%BB%EF%BF%BD.jpg?type=w1200



피터와 친구 존 처번(John Chirban)이 MIT에서 찰스 강 건너편 켄모어 광장에 있는 델리 하우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는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존은 닭 간과 맛초 수프, 치즈 블린츠를 좋아했고, 피터는 커다란 파스트라미 샌드위치와 햄버거, 치즈케이크를 좋아했다.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광장을 지나다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1980년대 후반인 그때까지도 펑크 록 가수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물론 음악이나 패션, 음식 따위를 논하기 위해 만난 자리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다.) 그날 밤 논의 주제는 과학의 진리와 종교가 서로 합치되는 부분에 관한 것이었다.

피터보다 열 살 많은 존은 친구이자 멘토이며 고문이었다. 존은 우주를 향한 피터의 열정에 탄복했지만 동조하지는 않았다. 하버드를 졸업한 심리학자이자 교수였으며(피터와 같은 그리스계 미국인으로 신학박사 학위도 있었다), 영적인 문제에 심취했다. 존은 거의 20년 동안 저명한 행동주의심리학자 B. F. 스키너(B. F. Skinner)를 만나, 자유의지 대 결정론이라든가 영성이 논리적일 수 있을까 등과 같은 주제를 놓고 의견을 묻고 토의했다. 존이 감정은 행동의 조건과 독립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스키너는 영혼이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거나 ‘과학적 사실과 맞지 않다’고 하며 영혼의 존재를 부정했다.

피터를 존에게 소개한 사람은 교구 신부였다. 우주를 사랑하던 대학생 피터는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그리스정교의 전통에 의문을 품었다. 아직도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있을 때는 교회에 갔지만, 혼자 있을 때는 거의 가지 않았다. 피터는 존에게 교회에 잘 다니지도 않으면서 아직도 향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니 참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의대가 열정이라기보다는 의무에 가까웠던 것처럼, 교회는 그냥 전통이었다. 일요일이면 으레 가족이 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과학은 피터에게 록 음악과 같았다. 피터는 ‘물리적 현상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가가 궁금했다.

“저 어딘가에 영적인 존재가 있을까요?” 피터가 블랙커피를 홀짝거리며 물었다. “물질 너머에 에너지가 있을까요? 생명을 이끌어 가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피터가 존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지구상에 있는 생명의 기원은 외계인이 남긴 흔적일까요?”

존은 피터의 질문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고 빙그레 웃었다. 피터가 생각하는 생명의 에너지는 교회에서 배운 것이라기보다 <스타워즈>에 나오는 포스(Force)에 가까웠다. 존은 최고 수준의 대학에서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며 그들을 능가하는 피터의 내면에 순진무구함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훌륭한 가정에서 사랑을 받고 자란 젊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아주 좋아하는,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피터에게는 선교사 같은 열정이 있었다. 다만, 고다드와 폰 브라운이 그의 신이었고, 《아틀라스》와 《우주 정착지》의 교차점이 성경이었을 뿐이었다. 존은 생명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고, 이 점을 스키너에게 분명히 했었다. 하지만 스키너는 성장과정의 영향으로 종교를 경멸했다. 성인이 되었을 때 스키너가 남긴 업적은, 선택도 없고 자유도 없다는 생각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모든 행위는 환경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며 신의 역할을 전면 부인하였다. 존은 피터에게, 스키너는 ‘과학’을 자기 종교로 삼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콜카타의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가 하버드에 왔을 때 스키너에게 강연을 들으러 같이 가자고 했던 날이 생각나서 빙긋이 웃었다. 스키너는 테레사 수녀가 ‘자기도취에 깊이 빠진 사람’이라며 가지 않겠다고 했었다. 존과 스키너가 일치하는 부분(피터와 존이 일치하는 부분이기도 했다)은 진리라는 가장 중요한 질문에 관한 것이었다.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모르는 것이 이렇게 많고 앞으로도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존이 앨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말을 인용해 피터에게 이렇게 말했다.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요,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

피터가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며 복사로 있을 때 교구 신부가 피터에게 일요일 설교를 한번 해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알렉스 신부는 가끔 신도에게 설교를 부탁했는데, 이날은 피터가 200명가량 되는 신도 앞에 서게 되었다. 피터는 한동안 ‘하나님’이라는 말을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고 설교를 했다. 그 대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창조적인 힘이라는 뜻으로 ‘메타 지성(meta intelligence)’이라는 용어를 썼다. 메타 지성은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이고,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주를 탐사하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피터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이 우주에서 우리가 유일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가장 지능이 높은 종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알렉스 신부는 피터가 일반적으로 쓰지 않는 말로 자신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흥미롭게 들었다. 신부는 피터가 말한 메타 지성을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에서 말하는 ‘제1원인’으로 받아들였다. 제1원인 이론에서 신은 원인 없이 존재하는 원인이다. 신도들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지만 신부는 혼자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피터는 언제나 과학이 제기하는 심오한 철학적인 문제에 마음이 끌렸다. 한번은 사람을 복제해도 괜찮다는 논리를 담은 리포트를 쓰기도 했다. 의대에 다닐 때는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물질이 무엇인지, 또 생명력이 멈추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1988년 이른 봄 피터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다. 이미 MIT에서 항공공학 석사학위는 받았다. 래리 영 박사가 학위 논문을 통과시켰다. 나사는 피터가 인공중력침구를 포함해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앞으로 3년 동안 연구비를 지원해주기로 하였다.

피터는 델리 하우스에 앉아 포크로 치즈케이크를 깔짝거렸다. 새벽 두 시가 넘었지만 두 사람은 아직도 종교와 진리를 찾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존은 아인슈타인과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를 비롯해 위대한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진리의 종류는 다양하고 의식 수준은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지적했다.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그는 얀센파였다), 갈릴레오(Galileo),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를 비롯해 과학의 틀을 다진 유명한 사람들은 기독교 신자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했다. ‘어떤 사물을 관찰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당신이 적용하는 이론에 달려 있다. 무엇을 관찰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이론이다.’ 또, 테슬라는 물질과 에너지의 관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도 했다. ‘우주의 비밀을 발견하고 싶다면 에너지와 주파수 및 진동의 관점에서 생각하라. 어떤 사람은 신이라 부르는 것을 다른 사람은 물리법칙이라고 부른다.’

피터는 최근 6개월 동안 매일 성경을 읽었다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의미를 생각하려고 노력했어요. 교회 다닐 때는 일요일마다 읽어 보라고 정해주던 복음만 읽었는데, 최근에는 저 스스로 찾아 읽었어요.” 피터는, 고등학교 시절 하나님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았다면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요? 불가지론자가 되었지요. 모색 중입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도 해밀턴 대학 시절 돼지 태아를 훔쳐 퇴학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처럼 문제가 터지면, 하나님께 기도하게 돼요.”

피터가 존과 함께 자리를 뜨려고 일어서면서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가 한 말을 인용하며 말했다. “제가 믿는 게 뭔지 아세요? 치올코프스키가 이런 말을 했었지요. ‘지구는 인류의 요람이다. 하지만 사람이 요람에만 영원히 머물 수는 없다.’” 피터는 2개월만 있으면 스물일곱이었다. 피터에게는, 인류를 요람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전력을 기울이기 전에 넘어야 할 큰 장애물이 하나 있었다. 졸업을 하든지 깨끗하게 그만두든지 간에 하버드 의대를 정리해야 했다. 게다가 전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야심 찬 프로젝트도 하나 진행하는 중이었다.

피터와 토드 홀리는 비컨 가에 있는 베이글 가게 2층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국제우주대학ISU 세계본부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지원서 봉투에 찍힌 우체국 소인을 보고 놀랐다. 소련, 중국, 일본, 케냐, 스위스, 독일, 프랑스, 폴란드,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등 모두 37개국에서 350명이 넘는 사람이 처음 개최되는 ISU의 여름학기 수업을 받기 위해 지원한 것이었다. 몇 개월 남지 않은 이 수업의 수강생은 100명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피터와 토드는 우주로 가는 데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은 학생을 뽑기 위하여 하루도 빠지지 않고 편지와 이력서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두 사람은 리더십, 공학 기술, 창의성, 정치색과 국수주의를 극복하려는 성향을 가진 학생을 찾으려 노력했다. 후원을 부탁할 대기업과 초빙교수 명단도 작성해 놓았다. 또, 유명인사의 공개적 지지를 받기 위해 에드워드 케네디(Edward Kennedy) 상원의원, 존 글렌(John Glenn)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돌(Elizabeth Dole) 전 교통부 장관 등과도 접촉했다.

바이런 리히텐버그, 러스티 슈바이카르트, 로켓의 개척자 헤르만 오베르트, 《우주 정착지》의 저자 게리 오닐 등 우주인과 과학자가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첫 여름학기는 MIT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강좌는 우주 건축, 경영학, 우주공학, 우주 생명과학, 우주 과학, 정책과 법, 자원과 가공, 위성의 응용 등 모두 8개 과정이었다. 첫 강의는 6월 27일 우주 자원과 가공을 주제로 ‘맥도넬 더글러스 항공우주사(McDonnell Douglas Astronautics Co).’의 찰리 워커(Charlie Walker)가 할 예정이었다. 마지막 강의는 8월 16일 유럽우주기구의 대표인 로저 보닛(Roger Bonnet)이 하기로 하였다. 강의를 하기로 약속한 초빙교수는 모두 합해 100명이 넘었다. 피터와 토드는 수백 명의 지원 학생 가운데 104명을 추린 다음 외국에서 오는 학생들을 위해 비자 신청 작업에 들어갔다. 각종 재단, 개인, 기업, 정부기관 등으로부터 접수한 기금은 100만 달러를 넘었다. 수업료는 1만 달러로 결정되었다.

피터와 토드는 파이퍼 체로키(Piper Cherokee)를 타고 비행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면 그림을 그리거나 그 내용을 글로 옮겼다. 한번은 두 사람이 함께 스키를 타러 갔다가 리조트의 시설물 배치가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키 타는 시간보다 리프트 타느라 낭비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슬로프를 타고 내려와 180도로 방향을 전환한 뒤 산 밑으로 판 경사진 터널로 내려가 거기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산꼭대기로 다시 올라가는 스키장을 생각하고 그림으로 옮겼다.

피터와 마찬가지로 토드도 일기를 썼다. 그런데 일기장 맨 위에 연월일을 기재하는 대신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날의 수를 적었다. 그때쯤 토드가 살아온 날은 9,000일이 넘었다. 피터도 곧 토드가 쓰는 ‘생애 시간 기록’ 방식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살아온 날짜와 시간과 분을 알려 주는’ 시계를 만들어 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그런 시계에 대한 아이디어에 서명하고 날짜를 기록했다. 피터는 9,791일이었고, 토드는 9,828일이었다. 한번은 두 사람이 보스턴 뉴베리 가에 있는 트라이던트 카페에서 점심을 먹다가, 여종업원이 발을 헛디뎌 음식 담은 쟁반을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고 아이디어가 떠오른 적도 있었다. 피터가 쟁반 안에 회전하는 자기 디스크를 넣으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했다. 그러면서 자기 생각을 노트에 적었다. ‘이것은 자이로스코프를 이용해 평형을 유지하는 쟁반이다. 이 쟁반이 특별한 점은 모터나 건전지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음식을 담으려고 카운터에 쟁반을 놓으면 자기 디스크가 필요한 회전 속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1950년 중반 존 멀론 박사가 고안한 영어 중심의 음성기호로 알려진 UNIFON에서 힌트를 얻어, 인간이 내는 중요 발음은 다 나타낼 수 있는 ALFON이라는 문자를 만들기도 했다.

두 사람은 독창성이나 우주에 대한 열정이 비슷해 잘 어울렸지만, 가끔 의견이 맞지 않아 티격태격할 때도 있었다. 이럴 때면 밥 리처즈가 끼어들어 둘을 화해시켰다. 토드가 이상주의자라면, 피터는 실용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이었다. 피터가 보기에 토드는 가끔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입을 다물고 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성격 차이를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눈앞의 대학 창립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몇 달이 지난 1988년 6월 24일 금요일 저녁, 21개국에서 온 104명의 대학원생이 국제우주대학 창립식을 위해 MIT에 모였다. 소련에서 온 학생이 미국 학생 옆에 섰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온 학생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학생과 같은 기숙사를 썼다.

주말에 서로 얼굴을 익히고 기숙사 생활에 적응한 뒤 월요일 아침 일찍 반별로 강의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여름학기에 정해진 설계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팀을 구성하였다. 달 기지 청사진을 만들 예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동수단, 월면 활동, 인간의 행태, 환경에 미치는 영향, 달에 있는 기계장치를 실시간으로 제어하는 방법 등의 문제와 씨름해야 했다. 피터와 밥과 토드는 이 강의실 저 강의실을 뛰어다니며 달 기지 프로젝트가 제대로 되어 가는지 점검했다. 세 사람은 파티를 주최하기도 했고, 교수들을 안내하기도 했으며, 기숙사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첫 주에는 문의 사항이 워낙 많아 잠을 거의 잘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던 꿈이 실현된 것이었다. 피터는 해리 클로어(Harry Kloor), 레이 크로나이스(Ray Cronise) 등 평생의 친구가 될 만한 사람들도 만났다. 해리는 물리학과 화학에서 동시에 학사학위를 땄는데, 두 분야에서 동시에 박사 학위도 따려고 하는 학생이었다. 레이는 마샬우주비행센터(Marshall Space Flight Center) 과학자로 나사의 무중력 비행기를 수도 없이 탄 경험이 있었다. 해리와 레이 주위에 매력적인 여자가 들끓는다는 사실도 인상적이었다. ISU의 첫 여름학기는 8주 후에 끝났다. 1988년도 졸업식은 8월 20일 토요일 오전 10~12시 사이에 크레스기 강당에서 열렸다. 초기부터 SEDS와 ISU를 지원해주었던 달변의 학교 이사 데이비드 C. 웹(David C. Webb)이 개회사를 했다. 웹은 개회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배움은 학습하는 경험 이상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배움은 창조적인 경험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미래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화면에 아서 C. 클라크 총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인텔샛의 무상 지원으로 두 번의 위성 중계를 거쳐 고향 스리랑카에서 보내오는 영상이었다. 아서 아저씨는 학생들에게 축하 인사를 한 뒤 자신이 ‘피터밥토드 삼총사’라 부르는 세 사람의 노력을 칭찬했다.

클라크는 낭랑한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앞으로도 꾸준히 협력하고 ‘지속적 유대관계를 형성해 국제친선을 강화해 나갈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주개발 계획의 틀을 만들고, 새롭고 획기적인 분야로 나아가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ISU는 인류를 암흑시대에서 르네상스로 이끄는 교육을 하는 세계 최초의 대학이라고 했다. 클라크는 ‘일 년을 계획한다면 곡식을 심고, 십 년을 계획한다면 나무를 심고, 백 년을 계획한다면 사람을 가르쳐라’는 중국 속담을 인용하며 축사를 끝냈다. 피터는 이 말을 듣고 빙긋이 웃었다. ISU의 씨를 뿌린 사람이 아서 아저씨였기 때문이었다. 아서 아저씨는 빈에서 처음 만날 때부터 인류가 우주에 대한 꿈을 공유한다면 정치적 차이나 문화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마지막으로 피터가, 몸은 지칠 대로 지쳤지만 들뜬 마음으로 연단에 올랐다. 피터는 지난 8주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이면서도 힘들게’ 보낸 시간이라고 했다.

“또, 두말할 필요 없이 가장 보람차고 재미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경험을 통해 제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다시는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의 출신 국가를 ‘외국’으로 보지 않겠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의 나라는 제 친구의 고향입니다.” 피터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여러분은 240시간이 넘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MIT 한 학기 평균강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입니다. 거기다 달 기지 설계 프로젝트에 투입한 시간이 각자 280시간가량 됩니다. 또, 파티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문화교류 활동을 하느라 적어도 300시간은 썼습니다.”
이 말을 듣고 졸업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하버드로 돌아온 피터는 의과대학 과정을 밟으며 ISU 관련 업무를 처리하느라(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릴 다음 여름학기를 준비해야 했다) 힘든 나날을 보냈다. 피터는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매일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근무하고, 사흘에 한 번은 당직 근무를 하며 신경학과 임상실습을 마쳤다. 우울한 기분에 빠진 피터는 일기에다 이렇게 썼다. ‘내가 의사가 되지 말아야 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내 눈앞에 생생하게 보인다. 끊임없이 요구를 받는 환경에다 창의성을 발휘할 공간은 거의 없고, 금전적 보수도 박하며, 성공 가능성은 낮다. 어쨌든 내 정식 직업으로는 맞지 않다.’

1988년 9월 하순 피터는 산부인과 임상실습을 끝마쳤다. 그동안 피터가 분만을 도운 아이는 남자아이가 22명, 여자아이가 14명이었다. 11월과 12월에는 외과 임상실습을 할 예정이었다. 그때는 매일 새벽 4시 반에 자명종을 맞춰 놓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동생 마르셀이 그 시간에 익숙해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해 초에 결혼한 마르셀은 외과 레지던트 2년차였다. 피터는 도저히 새벽 4시 반에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동생이 결혼했다는 사실도 실감 나지 않았다. 자기는 데이트할 시간도 거의 없지 않은가. 마르셀은 오빠가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큰 문제 없이 여러 가지 일을 해 나간다며 하버드를 비꼬는 말을 자주 했다. 피터 입장에서는 알바니의대의 엄격한 학사관리가 놀라웠다. 그래서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내가 하버드에 다녀서 정말 다행이야.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쫓겨나기는 더 어려운 곳이거든.”

차이가 있다면 동생은 대학을 운영하는 부수적인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피터는 열정적인 도전 과제를 또 하나 늘렸다. 처음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을 공동 창업하기로 했다. 회사 이름은 ‘인터내셔널 마이크로스페이스(International Microspace)’로 정했다. 목표는 그때까지 정부나 거대 기업만 했던 일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위성을 궤도에 쏘아 올리는 일이었다. 새 회사는 밥 노트붐(Bob Noteboom)이라는 나사 기술자를 수석 엔지니어로 채용하였다. 노트붐은 비용이 극히 적게 들어가는 독특한 다단계 발사 장비를 가지고 있었다. 우주를 사랑하는 통신 기업가 월트 앤더슨(Walt Anderson)이 창업자금을 투자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갑부가 된 앤더슨은 가끔 현금 대신 금괴로 값을 치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토드 홀리처럼 꿈을 좇는 사람이었고, 소설, 《아틀라스》의 저자인 아인 랜드(Ayn Rand)의 팬이었고, 극단적인 자유주의자였으며, 초기부터 ISU의 경제적 후원자였다. 새 회사는 존슨 우주센터(Johnson Space Center)가 있는 휴스턴에 자리를 잡고, 로켓 엔진 시험을 시작하였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해야 할 일을 적은 피터의 목록은 점점 늘어 갔다.

ISU에서 피터의 역할 중 하나는 교육과정 위원회 회의를 주재하는 것이었다. 위원회는 여름에 가르칠 과목을 조정하기 위하여 1년에 두 번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다. 피터는 1989년 스트라스부르에서 개최될 여름학기를 대비한 교육과정 위원회를 위하여 보스턴 백베이 지구에 있는 화려한 하버드 클럽의 방 하나를 예약했다. ISU 생명과학과 학과장인 하버드 의대 수잔 처칠(Susanne Churchill) 교수, 하버드-스미스소니언 천체물리학 센터(Harvard-Smithsonian Center for Astrophysics) 지오바니 파지오(Giovanni Fazio) 소장, MIT의 래리 영 박사 등 피터가 섭외한 학과장 모두 참석 가능하다는 통지를 보내왔다. 피터는 회의가 열리는 토요일에 의대 일정이 없어, 그날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위원회 회의는 어떤 학과에서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하느냐를 두고 우호적인 분위기의 말다툼으로 이어질 때가 많았다.

그런데 오랫동안 준비한 회의가 열리기 며칠 전에 피터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교육과정 위원회를 개최하는 날 정신과 임상실습이 잡혀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학교에서 일정을 조정해 잡은 날짜라 빠질 수 없다고 했다. 피터는 이 병원 저 병원 정신과 병동을 옮겨 다니며 환자와 의사를 만나야 했다.

임상실습을 빠질 수도 없었고, ISU 교육과정 위원회를 취소할 수도 없었다. 피터는 자기 앞에 놓인 딜레마를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런 다음 자리에 앉아 코먼웰스가에 있는 하버드 클럽에서 인근에 있는 병원까지의 거리를 기록하며 지도를 그려 보았다. 클럽에서 매사추세츠 종합병원까지는 2.7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걸어서는 20분 정도, 대중교통으로는 17분 정도 걸리겠지만, 택시로는 10분 미만이면 될 것 같았다. 피터는 임상실습할 병원 사이의 거리와 소요 시간을 계산하고, 각 병원과 클럽 사이의 거리와 소요 시간도 계산해보았다.

회의가 열리는 날 아침 피터는 의사 가운과 수술복, 의료 기록지, 기타 장비를 배낭에 챙겨 넣었다. 피터는 하버드 클럽에 도착하자마자 배낭을 화장실에 숨겨 두었다. 그런 다음 참석자들 앞에 얼굴을 보인 뒤 그날의 일정을 설명했다. 회의가 시작되어 강의 시간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들어가자마자 피터는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가서 양복을 벗어 구석에 잘 숨겨 둔 다음 흰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건물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그날 처음 가야 할 정신과 병동으로 향했다. 피터는 레지던트나 의사가 자기를 확인했다는 사실을 알기 바쁘게 몰래 빠져나와 다음 병원으로 향했다. 택시를 못 잡으면 걸어서 이동하는 바람에 다음 병원에 도착할 때쯤에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피터는 오전 내내 이런 일을 반복하다 점심때쯤 하버드 클럽에 다시 갔다. 점심식사 후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잡아타는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피터는 자신이 옷을 갈아입고 슈퍼맨으로 변하는 클라크 켄트(Clark Kent)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단지 자신과 슈퍼맨이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가장 필요한 하늘을 나는 능력이 없었다.

하버드 클럽에서 회의를 하던 수잔 처칠 교수는 피터 디아만디스의 정신없이 바쁜 모습을 보고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피터가 한군데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잔 교수는 피터가 자기 집으로 전화를 걸어 대학원 수준의 국제우주대학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얘기하던 밤을 잊을 수가 없었다. 교수는 피터를 의대생으로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우주에 관심이 엄청 많은 학생이었다. 수잔 교수는 극미 중력이 심혈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해, 계측기를 단 영장류를 실험동물로 쓰는 방법을 개발하는 연구에 관해 피터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그날 밤 교수는 전화기를 들고 부엌에 서서, ISU를 만들겠다는 피터와 그의 친구들(모두 20대였다)의 비전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피터가 교수에게 생명과학과의 초대 학과장이 되어주겠느냐고 물었을 때 교수의 반응은 “자네 정신 나갔는가?”였다. 하지만 통화가 끝날 때쯤 교수는 수락하고 말았다. ISU의 첫 여름학기에 수잔 교수는 하나의 주제하에 세계인이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했다. 수잔 교수는 한 무리의 시끌벅적한 소련 학생들이 KGB 요원을 뒤에 달고 수업에 참석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직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이었고, 미국과 또 다른 우주 강국과의 대화는 단절되어 있을 때였다. 수잔 교수는 피터와 그의 동료들이 최초의 소련 의사 우주인 올레그 아크토프(Oleg Aktov)를 ISU에 초대한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올레그 뒤에도 KGB 요원이 붙어 있었다.

우주와 의학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하루를 마친 피터는 하버드 클럽에 혼자 앉아 있었다. 병원 순회도 끝났고 교육과정 위원회도 마무리 지었다. 몸은 파김치가 되었다. 자기가 해낸 일을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다. 정신병동 임상실습 도중 치료를 받아야 할 환자가 이 친구가 아닌가 하는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던 몇몇 의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몇 주 후 피터는 자기 우편함에서 학장이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피터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편지 봉투를 열었다. 최근 외과 임상실습 중에 있었던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실습 도중 갑자기 뛰어나가 벽돌만 한 크기의 모토롤라 휴대폰으로 전화를 받았었다. 회사(인터내셔널 마이크로스페이스)의 수석 엔지니어 밥 노트붐이, 최근에 있었던 로켓 엔진 실험 결과를 설명하려고 휴스턴에서 전화를 건 것이었다. 편지 내용은, 하버드의대의 댄 토스테슨(Dan Tosteson) 학장이 피터에게 자기 방에 잠시 들렀다 가라는 것이었다. 토스테슨은 피터가 매우 존경하는 학장이었다. 학장은 해마다 1학년 학생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 바비큐 파티를 열어 환영회를 해주었다. 학장은 스스로 노력하여 뛰어난 과학자가 된 사람이었다. 피터는 좋지 않은 일로 자기를 부르는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면담일이 되어 피터는 토스테슨 학장 책상 맞은편에 앉았다. 인사가 끝나자 학장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피터 군, 자네를 담당하는 인턴과 레지던트 말이 임상실습에 성실하게 임하지 않고 있다는데 맞나? 늦게 나오거나 아예 나오지 않을 때도 있고, 또 항상 전화기만 붙들고 있다는 말을 들었네.”
피터는 얼굴에서 핏기가 쫙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학장은 걱정스럽다고 하며 피터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알고 싶다고 했다. 금전적 문제인가? 집안에 큰일이 생겼나? 혹시 말 못할 곤경에 빠진 것은 아닌가?

피터는 갑자기 돼지 태아를 잠시 빌렸다가 인생이 끝날 뻔했었던 해밀턴 대학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미 의대 4년 기간 중 3년을 넘게 다녔다. 끝이 눈앞에 보이는데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부모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피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다음 학장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저는 지금 국제우주대학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휴스턴에 로켓 회사도 설립했는데 제가 CEO로 있습니다. 수백만 달러의 투자를 받았기 때문에 꼭 성공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의대를 절대 그만둬서도 안 됩니다. 가족이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학장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얼굴에 어정쩡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HST 과정에서만 가능한 일이로군.” 학장이 피터를 쳐다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대학과 로켓 회사를 운영하면서 의대를 마치고 싶다고?”
피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하고 싶은 게 뭔가?” 학장이 물었다.
“의학도 재미있지만, 인간을 우주로 보내는 일이 정말 좋습니다. 의학학위를 받으면 부모님이 기뻐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우주 관련 일을 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고요.”
“진료를 하고 싶은가?” 학장이 물었다.
“아닙니다. 하지만 학위는 받고 싶습니다.” 피터가 멋쩍은 표정으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학장이 입을 열었다. “알겠네. 제안을 하나 하겠네. 만약 자네가 임상실습을 모두 끝마치고 2차 의사자격시험을 통과한다면 자네를 졸업시켜주겠네.”
피터가 자리를 뜨려고 일어서자 토스테슨 학장이 피터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피터 군, 나한테 약속을 하나 해줘야겠네.”
피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약속이든 하겠습니다.”
“앞으로 진료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게.”

피터는 학부와 대학원 공부에 모두 9년을 바쳤다. 결승선이 눈앞에 다가왔지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피터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병원에서 의술을 공부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내 마음과 정신은 하늘에 가 있다. 내가 진료를 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나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여기까지 와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학위를 끝마칠 의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피터는 ISU와 인터내셔널 마이크로스페이스 관련 일을 못하게 되어 억울해하며 3주 동안 밤낮없이 의사자격시험 공부에 매달렸다.

시험이 끝나고 나자 피터는 시험 결과가 도착했는지 보려고 매일같이 놋쇠로 도금한 우편함으로 달려갔다. 혹시 불합격했을까 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거기다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토드 홀리의 행동이 이상했다. ISU 사무실에 오지 않을 때가 많았고, 밤늦게 여기저기 헤매기도 했다. 피터는 토드가 없으면 ISU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토드가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토드도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편지가 도착했다. 의사국가시험위원회(National Board of Medical Examiners)에서 온 편지는 1989년 9월 소인이 찍혀 있었다. 피터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보았다. 서류 오른편 상단에 있는 합격과 불합격을 기재하는 난에 제일 먼저 눈이 갔다. 합격이라는 단어가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피터는 서류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하버드 의대를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내가 해냈다. 합격선은 290점이었지만 피터는 360점을 받았다. 정신과학과 산부인과학 점수가 가장 높았다. 피터는 빙긋이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아빠를 위한 거예요.”

피터는 1989년 11월 21일 의학 학위를 받았다. 연단에서 학장이 학위증을 수여할 때 피터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정말입니까? 정말 주시는 겁니까?’라고 묻는 것 같았다.

축하행사가 모두 끝나고 피터는(이제 지구상에 산 지 1,000일이 훌쩍 넘었다)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피터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은 내 남은 인생의 첫날이다. 마침내 의학에 대한 지적 의무이자 감정적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지금부터 내 영혼과 내 마음을 레이저 같은 강렬함으로 우주의 미개척지에 집중할 것이다.’


피터 디아만디스(Peter Diamandis)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07. 영업은 길을 찾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