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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Feb 09. 2018

08. 책에 생명을 불어넣다, 주잉춘

<중국 디자인이 온다>



1970년대 장쑤성 북부의 농촌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주잉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장난감 대신 곤충들과 함께 논밭을 쏘다니며 뛰어놀았다. 두 볼을 간질이는 바람과 더위를 식혀주는 나무 그늘만 있어도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느릴 만(慢)자 앞에서 사진을 찍은 주잉춘. 그의 디자인 철학을 담은 듯 하다.


이윽고 난징사범대학 중국화과에 입학하면서 그의 대도시 생활이 시작된다. 번잡한 도시 생활을 하며 그의 행복했던 유년 시절은 차차 봉인되었다. 난징사범대학 출판사에서 미술 편집자로 일하던 그는 야근 때문에 늘 사무실에서 밤을 샜고 늦어지는 마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는 해마다 자신의 상태가 좋아지지 않음을 느끼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결국 ‘안정적인 수입’과 ‘정신적 여유’ 중 지금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되묻고 출판사를 그만두고 나와 2004년 ‘슈이팡공쭈오(书衣坊工作)’라는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슈이팡공쭈오는 ‘책의 옷을 짓는 공방’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치수를 재어 몸에 맞는 옷을 짓는 것처럼 책 역시 그 내용에 걸맞는 장정을 만들겠다는 의미다. 이는 그가 출판사를 다니던 시절 마감에 쫓겨 책의 의미를 제대로 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반성이기도 하다. 슈이팡공쭈오에서는 매 책마다 그에 맞는 아름다움과 독특한 의견을 담아내며 진정으로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스튜디오를 설립하며 주잉춘은 중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독자적인 북디자인 세계를 펼쳤다. 2006년, 주잉춘의 대담한 시도를 담은 책 『재단하지 않은 책(不裁)』이 발행되었다.


이 책은 구시죠우(古十九)라는 작가가 신문에 기고한 것을 묶은 것으로 일상의 평범한 미학을 담은 에세이집이다. 저자는 세상만사를 돌아보며 타인의 심리를 헤아려 더 큰 세상을 이해하고, 타인의 허물을 통해 자신을 더 명확히 인식하고자 한다. 날카롭고 풍자적인 글이지만 따뜻하면서도 잔잔한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주잉춘은 『재단하지 않은 책』에서 에세이 하나하나에 실린 감동적인 이야기에 주목했다. 한 호흡으로 단숨에 읽는 소설과 달리 에세이는 각 장마다 본연의 리듬이 있었고 주잉춘은 독자들이 한번에 이 책을 읽기보다는 장마다 천천히 내용을 음미하며 읽기를 바랬다. 이에 그는 파격적인 시도를 한다. 책의 단면을 실로 꽁꽁 제본하고 책 앞에 작은 종이칼을 삽입한 것이다. 독자들은 책을 읽기 위해 종이칼로 실을 끊어 내야 했고 책장을 넘길 때도 직접 한 면 한 면 재단해야 했다. 과정은 번거로웠지만 책을 재단하면서 독자들은 다음 장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었고 앞서 읽은 내용들도 차분하게 되짚어갈 수 있었다. 그는 편집 디자인에서도 여백을 많이 두어 책을 읽다가 느낀 점을 그때그때 메모할 수 있게 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책 자체의 질감에도 변화가 생긴다. 처음 구입했을 때 실로 묶여 있어 단면이 매끈한 상태였다면 독자가 책을 재단함에 따라 울퉁불퉁한 상태로 뒤바뀐다. 마치 책이 새 생명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독자와 교감하며 변화하는 『재단하지 않은 책』의 장정 디자인은 출판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2007년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전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룬다.


이듬해 『재단하지 않은 책』의 뒤를 잇는 『울지 않는다(不哭)』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총 18편의 하층민 이야기를 다룬 신문기사집으로, 많은 출판사에서 이 책의 출판을 거절했다. 잘 팔릴만한 책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각각의 하층민 이야기는 서로 모습과 형태는 다르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고 주잉춘은 이 책을 출판하기로 결정한다. 앞서 『재단하지 않은 책』에서 각 이야기의 호흡을 유지하기 위해 실로 제본된 디자인을 시도했다면, 『울지 않는다』에서는 이야기의 차별성을 살리기 위해 각각 다른 질감의 종이를 선택했다. 거친 크라프트지, 끄트머리가 성긴 백상지 등… 종이들은 각 이야기의 내용을 반영했고 표지 종이 역시 1980년대 신발 상자의 폐지 느낌을 응용하여 디자인했다. 독특한 형식의 디자인과 잔잔한 서사를 가진 『울지 않는다』는 중국에서 화제의 책으로 떠올랐고 출판을 거절했던 많은 출판사들이 뒤늦게 책의 판권을 문의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그러나 『울지 않는다』가 진정으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 지점은 수익의 전부를 책에 등장했던 사람들에게 기부했다는 데 있다. 하층민들의 이야기를 단순히 책을 팔기 위한 소재로 사용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개선시키고자 노력했던 작가와 주잉춘의 태도에 독자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재단하지 않은 책』과 『울지 않는다』가 연이은 성공을 거두며 주잉춘은 기획부터 편집, 디자인까지 함께하는 중국의 대표 북디렉터로 떠올랐다. 자체 출판사를 차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거둔 성공이라 한껏 고무되었지만 마음 한편에 공허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빌딩이 많은 복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정착할 만한 곳을 찾아 헤맸다. 작업실을 네 번이나 옮긴 끝에 그가 둥지를 튼 곳은 낡은 폐공장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고 밭에서 나오는 작물을 먹으며 생활했다. 채소들은 농약을 치지 않아 벌레 먹은 구멍이 나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농작물을 벌레와 나눠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도시에서 바쁘게 생활하며 잊었던 유년 시절의 기억들을 되살렸고 논밭에서 곤충들과 뛰놀았던 과거를 회상했다. 그리고 작업실 주변에서 보이는 벌레들을 찬찬히 관찰하며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개미의 삶이 담긴 『나는 한 마리 개미(蚁呓)』라는 책을 발표했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처럼 먹이를 찾아다니고 싸움질을 하고 동료의 시체를 묻는 개미의 삶을 담담히 묘사했다. 우리에게 개미는 한낱 미물이지만 인간 역시 우주에서 보면 아주 왜소한 존재임을 강조하며 개미와 인간의 생명이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 책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 선정되며 주잉춘의 새로운 시도가 성공적으로 전달되었음을 증명했다.











이처럼 주잉춘은 우리 주위의 미물들에 대해 섬세한 시선을 던지는 작업을 이어 갔다. 그의 출판사에서는 1년에 2권밖에 책이 나오지 않을 때도, 2년 동안 책이 한 권도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경제적 여건에 개의치 않았다. 마치 벌레들처럼 그날그날 먹을거리만 있으면 충분한 삶이었다.

이렇게 소요하는 삶을 살던 그는 2013년 발목 부상을 입었다. 생각보다 부상 정도가 심해 밭을 일군다거나 일상의 작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상에 좌절하지 않고 이 시기를 휴식의 기회로 삼기로 했다. 그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근처 호숫가를 매일같이 찾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호숫가 풍경을 바라보며 자연 속에 깊이 빠져들었다. 자연은 매일 매 순간 아름다운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날이 새면 호숫가에 배가 정착해 있고, 작은 새와 나비가 여울져 날아다니고, 호수 한편에서는 하늘소와 거미가 치열한 격투를 벌이고 있으며, 비가 오기 전이면 잠자리가 낮게 날아다녔다. 그는 이런 변화무쌍한 자연 풍광 속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며 자연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기록한 『공도(空度)』라는 책을 만들었다. 그는 이 책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은 매일 달라지며 변화한다. 인간은 어둠을 뚫고 세상으로 찾아와 빛을 찾고 다시 어두운 곳으로 돌아간다. 이 책은 인간과 자연의 생을 기록한 단 한 권의 책이다.”

그는 이 책의 제작에 유달리 정성을 들였다. 사진의 색감을 가장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는 종이를 선정하여 인쇄를 했고 모든 책을 수공으로 제본했다. 제작비와 공정 때문에 천 권밖에 제작되지 못했지만 이렇게 완성된 『공도』는 지금까지도 주잉춘의 책 중에서 예술성과 실험성을 겸비한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전자책과 다른 차원에서 종이책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전자책과 다르게 종이책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종이는 나무에서 만들어졌고, 그것을 제작하는 사람들의 손길이 들어간다. 또 독자들이 소장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감정이 불어넣어지기 때문에 전자책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다. 따라서 그는 종이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독자들이 책의 생명감을 느끼게끔 제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곤충과 함께 논밭을 쏘다니던 시골의 아이는 책에 진정한 의미의 생명을 불어넣는 중국의 대표적인 디자이너로 부상했다. 앞으로도 그의 손끝에서 탄생할 아름답고 특별한 책들을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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