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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Feb 22. 2018

04. 버스를 타고 무작정 남대문시장으로

<계단을 닦는 CEO>



참으로 성실하지만 맡은 일을 해낼 능력이 없었던 아버지는 번번이 사고를 일으켰다. 다행히 사람이 크게 다친 사고들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할수록 우리 집은 더욱 어려워졌다.
  
나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돈벌이에 나섰다.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대문 밖 출입도 잘 하지 않는 어머니와, 등록금 납부를 못 해 시달리는 동생들을 깔깔거리며 웃게 해주고 싶었다. 집안의 장녀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전자부품 만드는 회사에 취업했고, 졸업 후에는 외삼촌의 소개로 잠시 관공서 임시 공무원으로 일했다. 내가 일을 시작하면서 매일 김치죽으로 끼니를 잇던 가족들은 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이 늘어났다. 돈을 벌게 되니 사방이 꽉 막힌 감옥에 신선한 바람이 들어온 것처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 시기에 친구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났다. 대학생이었고, 내가 하지 못한 공부를 하는 그가 신기해 보였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친절하고 세련된 매너에 서서히 마음이 움직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감히 사랑이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솔직히 남녀 사이가 뭔지도 몰랐던 때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늘 움츠리고 위축된 아버지만 보아 왔기에 인류의 반을 차지하는 남자라는 존재를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 차가 지나갈 때 어깨를 감싸 안아 보호해 주고 문을 열어 주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나는 그의 달콤한 배려와 보호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어린 나이에 맞지도 않는 가장 노릇을 하느라 버거웠던 나에게 유일한 쉼터였다.
  
만난 지 몇 달 만에 임신했음을 알았고, 시댁과 우리 어머니의 치열한 씨름 끝에 혼인신고를 하고 작은 단칸방에 신혼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임신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남편은 방황했고 거친 폭언과 폭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혼전 임신으로 어머니를 실망시켰다는 죄책감 때문에 아무에게도 남편의 행동에 대해 털어놓지 못했다. 그저 아이만 낳고 나면 살아 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하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22세의 나이에 딸을 낳았다. 아이를 출산하는 날에도 피곤하다며 잠을 잤던 남편은 2주 후에 군대에 갔다. 아무에게도 축하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남편이 군대에 가면서 우리 모녀는 시댁으로 들어갔지만, 시댁은 우리를 불편해했고 남 보기에 창피하다며 문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했다. 시댁이 운영하는 돼지갈비집에 있던 작은 방이 우리가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뜨거운 열기에 아기가 매일 보채서 애를 먹었다. 영양부족으로 젖이 나오지 않아도 분유를 사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분유통 하나를 사면 아끼고 또 아껴서 먹여야 했다. 분유통 바닥을 박박 긁어서 가루를 모아 아기를 먹이면서 눈에서는 꾸역꾸역 눈물이 흘러나왔다.
  
고심 끝에 시댁 어른들에게 허락을 받고 집을 나왔다. 나는 아기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일자리를 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영양실조와 임신중독 증세로 고생하던 나를 보며 눈물을 흘렸던 어머니는 기꺼이 아기를 맡아 주었다. 남편이 제대하려면 한참 멀었고, 누가 우릴 먹여 살려 줄 것이라는 기대가 전혀 없었기에 나는 돈을 벌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나는 남대문시장으로 가는 버스를 보고 그대로 버스에 올라탔다.

시장 안의 수많은 가게를 둘러보다가 ‘옥동자’란 간판을 단 옷가게로 무작정 들어갔다. 아동복을 취급하는 가게였다.
  
“사장님, 저 여기서 일하고 싶어요.”
“뭐라고? 여기서 일한다고? 네가?”
  
사장님은 바싹 마른 체격에 단발머리를 한 나를 훑어보았다.
“이곳은 일하기 힘들어. 좀 더 쉬운 곳에 가서 알아봐라.”
“아녜요. 저 힘든 일 무척 잘해요. 한 번만 시켜 보세요!”
  
내가 간절하게 매달리자 사장님은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마지못해 허락해 주었다. 그날부터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아기를 키우는 일은 어머니가 전담해 주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남대문 장사는 아침부터 초저녁까지의 소매 장사(소비자에게 직접 물건을 파는 것)가 있고, 밤부터 새벽까지의 도매 장사(소매상들에게 물건을 파는 것)가 있다. 소매 장사 직원과 도매 장사 직원을 따로 두어야 바람직하지만, 그때는 생계가 절박했기 때문에 소매, 도매를 모두 맡아 일하는 점원들이 많았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시장 생활은 너무나 고단한 중노동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꾀부리지 않고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끼며 일에 열중했다. 내가 옷을 제법 잘 팔자 사장님은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들어왔어.”라고 감탄하며 후하게 월급을 챙겨 주었다. 옷가게 점원을 하게 되면서 우리 집은 김치죽을 완전히 끊고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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