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Feb 23. 2018

06.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계단을 닦는 CEO>



“쟤가 그렇게 일을 잘한다며?”
  
남대문시장에서 나의 이름은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졌다. 43킬로그램의 마른 몸이었지만 나는 옷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훨훨 날아다녔고, 화장실 갈 시간, 식사 시간을 줄여 가며 일을 했다. 손님이 있든 없든 자리에 앉아 있지 않고 옷 정리를 하며 바쁘게 움직여서 장사가 잘되는 가게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우리 가게에 한 번 들른 손님을 어떻게든 설득하여 우리와 거래를 트도록 유도했다. 손님을 상대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내 말을 꼭 들어 주세요. 우리 물건을 꼭 사주세요.’ 하고 빌었다.
  
포장도 야무지게 했다. 그 당시에는 비닐봉투가 없었다. 그래서 미군 사료포대에 물건을 담아서 빨간 노끈으로 동여매는 방법으로 물건을 포장했고, 손님들은 그것을 머리에 이고 서부역이나 서울역에 가서 정기화물 소포로 부치거나 직접 들고 기차에 탔다. 포장이 허술해 이동하다가 풀어지면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손님들이 곤란하기 때문에 나는 아주 야무지게 매듭을 지었다.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우리 가게에 들러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손님이 지고 있는 짐을 포장해 주곤 했다. 손님들은 무척 좋아했다. 포장을 잘해 준다는 소문 때문에 우리 가게에 들르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당시만 해도 남대문시장 건물은 지금처럼 냉난방이 잘되지 않았고, 특히 겨울은 무척 힘들었다. 옷장사하는 곳이니 난로를 둘 수도 없었다. 겨울에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동상에 걸려 발가락이 퉁퉁 부었다. 병원에서 “이러다 발가락을 잘라야 할지도 모른다.”는 엄한 주의를 듣기도 했다. 나뿐만 아니라 얼굴이나 손발에 동상이 걸린 사람들이 꽤 많았다. 발가락이 가려워서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 딸의 모습에 어머니는 쑥을 삶은 물에 발을 담그게 하는 등 민간요법을 총동원해 주었다.
  
달동네 무허가 반지하방에서 어머니와 네 명의 여동생, 내 딸까지 칼잠을 자며 나만 바라보는데 내가 어찌 버티지 않을 수 있었을까. “너만 안 생겼어도 너희 아버지랑 안 살았다.”는 어머니의 하소연은 내가 평생 갚아야 할 빚이었다. 그리고 내가 겪은 아픔을 결코 내 딸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기를 쓰고 하루를 살아 내면 우리 가족은 밥다운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내 손톱에 낀 때와 얼굴의 구멍마다 쌓여 있는 먼지를 보며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한 절박감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오늘까지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가게 매출이 껑충껑충 올라가고 단골이 늘어 가자 옆 매장들은 시샘과 부러움이 섞인 눈으로 우리 가게를 지켜보았다. 어느 날 앞집 가게의 언니가 명동에서 의상실을 운영하는 사장님을 소개해 주었다. 캐주얼복을 만들면서 가게 장사를 할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열정적으로 장사를 하는 데다 소위 ‘핏’이 잘 사는 몸매를 가진 점이 좋은 평가를 받아 나는 월급을 두 배로 받고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0년대 교복자율화 바람을 타고 장사는 불티나게 잘되었고, 내가 입고 장사한 옷은 연일 완판 행진을 이어 갔다. 나는 일반 점원 월급보다 인센티브를 더 많이 받았다. 내가 개미처럼 열심히 벌어서 몽땅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리면, 어머니는 일수를 놓거나 계를 하고 부동산을 매입하는 등 여왕개미처럼 그 돈을 잘 불려 주었다. 마침내 우리 가족은 무허가 반지하집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89년에는 독립해서 내 가게를 열었다. 내 생애 첫 사업이었다. 내 가게니까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일했다. 가게는 입소문을 타고 찾아오는 손님이 줄을 이었다.
  
나는 남편이 죽은 후 내 인생은 다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성녀로 추앙받는 마더 테레사는 “고통은 성장의 법칙이고, 우리의 인격은 세계의 폭풍우와 긴장 속에서 만들어진다.”라고 말했다. 참으로 근사하고 멋진 말이지만, 막상 고통을 겪으며 살 때는 그것이 사람을 성장시켜 준다는 이야기가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살다 보니 정말 다른 길이 있었다.
  
물론 나는 지금까지도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다.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울퉁불퉁한 감정덩어리가 갑자기 튀어나오곤 한다. 하지만 외면적인 모습의 나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달라져 갔다.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길은 여러 갈래였다. 그래서 인생이 끝났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다. 가보지 않으면 모르는 게 인생이고,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게 인생이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고, 하나의 문이 닫히면서 다른 하나의 문은 열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02. 정리하면 쓸데없는 소비를 줄일 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