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행복에 한 걸음 더 다가갑니다>
성공 행복론
글자 그대로 성공을 추구하는 행복론으로, 성공했을 때 가장 크게 행복을 느끼는 행복론이다. 여기에서 성공을 추구하고 또 성공했을 때 가장 크게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절대적이라기보다 상대적이다. 즉 다른 5가지 행복론에서 추구하는 무소유, 도덕, 이성, 종교 그리고 감성과 같은 가치들에 비해 성공에 더 큰 의미를 둔다는 것이지 오로지 성공만 추구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가치들에서도 행복을 느끼지만 성공 실현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경우다.
그러나 성공 행복론은 현실에서 여러 가지 한계도 지닌다. 성공 행복론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다른 행복론들은 모두 행복을 ‘상태’인 ‘진행형’으로 인식하는 데 반해 성공 행복론은 ‘결과’인 ‘완결형’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성공을 ‘상태’가 아닌 ‘결과’, ‘진행형’이 아닌 ‘완결형’으로 인식하게 되면 성공 행복론은 현실에서 신기루를 쫓는 행복론이 되고 만다. 살아가는 동안 몇몇의 순간만 행복할 뿐 대부분의 시간은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무소유 행복론
욕심과 필요를 줄이고 간소한 삶을 사는 데서 행복을 찾는 행복론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었다. 속도만을 중요시해온 현대인들에게 방향을 생각하게 하고, 축적의 만족만을 생각하고 살아온 이들에게 비움의 편안함을 생각하게 했다.
그러나 무소유 행복론은 현실에서 많은 한계를 지닌다. 바로 인간의 이기주의와 현실 삶에서의 물질적 필요 때문이다. 기대치를 줄인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도시에서 생계·자녀양육·최소한의 문화생활을 유지하는 데 적지 않은 물질이 필요하다. 무소유를 위해 기대치를 줄이고자 해도 현실에서 더 줄이고 말고 할 것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결국 무소유 행복론은 도시를 떠나 물질을 덜 필요로 하는 이들, 스님이나 신부님처럼 부양가족이 없는 이들 그리고 기대치를 낮출 만한 물질적 여유를 가지고 있는 일부에 한정되기 쉽다.
도덕 행복론
칸트의 도덕 본능이나 맹자가 주장하는 호연지기, 대장부, 양지·양능 또는 군자삼락 개념에서와 같이 도덕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는 행복론이다. 행복이 마음의 평화라 한다면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도덕 행복론이다. 맹목적 마음의 평화는 이성이 눈을 번쩍 뜨는 순간 언제든지 안개처럼 사라지고 만다. 도덕 행복론은 개인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동시에 그 이상의 사회적 평화를 가져온다. 즉 도덕 행복론은 개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만 사회에게는 개인 본인에게 주어지는 행복 그 이상의 큰 행복을 제공한다.
그러나 도덕 행복론 역시 다른 행복론들처럼 현실에서 한계를 지닌다. 이익을 얻기 위한 지능적 수단으로 도덕적 행동을 취하거나 심지어 도덕을 가장하는 이들이 많은 비도덕적 사회일 경우, 도덕 행복론자는 기대했던 만큼의 행복을 누리기 어렵다. 위선이 횡행하는 사회에서는 진정한 도덕도 위선된 행동으로 취급되기 쉽고 때로는 고도의 위선이 참된 도덕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한다. 또한 도덕 행복론자들이 일방적으로 계속해서 도덕적 희생을 요구받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의 의지에 맡겨져야 할 도덕적 행위가 외부의 압력에 강제되게 된다. 도덕이 더 이상 도덕으로 온존할 수 없다. 도덕 행복론 자체에 대한 회의가 들기 쉽다.
이성 행복론
‘이성’적인 삶을 삶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행복론이다. 이성적인 삶은 자신의 행복 계획을 ‘이성’적으로 세우는 것과 이성의 깊이를 더하는 삶을 사는 것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한다. 인간은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이성적 존재다. 따라서 이성 행복론은 당연히 가장 인간적인 행복론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가장 인간적인 행복론이지만 이성 행복론 역시 현실에서 한계를 지닌다. 그 한계는 다름 아닌 이성 이외에 또 하나의 인간 속성인 육체와 우리를 둘러싼 자본주의 환경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육체는 때가 되면 먹어주고 쉬어줘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는 생존 이상의 감각적 쾌락을 추구한다. 생존과 감각적 쾌락의 추구는 이기주의와 게으름을 낳는다. 그런데 이성은 정신적 ‘의지’이지만 이기주의와 게으름은 육체적 ‘본능’이다. 의지가 본능을 이기기 쉽지 않다. 이성 행복론 추구가 쉽지 않은 첫 번째 이유다.
이기주의와 게으름 못지않게 이성 행복론을 방해하는 또 다른 원인은 자본주의 환경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선(善)의 기준이 생산성이다. 분업화된 경쟁 환경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고도의 생산성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고, 사회적 인정도 받기 힘들다. 생존이 위협받고 자신을 인정하는 이가 없는 상황에서의 이성 행복론 추구는 아무리 인간적인 행복론이라 할지라도 너무나 고독하다. 이성 행복론의 길을 걷다가도 좌절하거나 자꾸만 좌우로 눈길을 돌리는 이유다.
종교 행복론
신을 모시는 직업을 갖거나 종교적 생활에 집중함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행복론이다. 인간은 유한하다.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삶을 자신의 노력으로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지만 죽은 뒤에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음은 물론 사후세계가 어떤 상태인지, 아니 사후세계가 과연 있기나 한지조차 알 수 없다. 종교는 필연적 고통인 이 죽음과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준다.
종교 행복론 역시 한계를 지닌다. 먼저 실천하는 종교인, 진정한 믿음의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진실한 종교인으로 살고자 하면 한편으로 신의 품 안에서 행복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현실에서 끊임없이 번민할 수 밖에 없다.
두 번째로는 종교의 가르침이 개인의 성장, 사회의 발전과 부딪힐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공동체에 따라서는 아직도 중세주의적 신 절대주의를 고수하는 곳이 있다. 중세주의적 신 아래에서 인간은 한 마리 작은 어린 양이 되고 만다. 불완전하나마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종종 불선不善으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이성 활용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결과적으로 사회 발전도 부정하는 셈이 된다. 그것은 비인간적이고, 인간에게 이성을 심어준 신의 의도에도 크게 어긋나는 일이다.
세 번째로는 종교에 대한 지나친 치우침이 삶의 균형을 깨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건강한 가족공동체 유지를 방해하는 종교활동, 생업 유지를 어렵게 하는 종교활동은 결과적으로 종교의 자기 부정이 되고 만다. 신이 종교가 있게 했다면 그것은 인간을 살리기 위한 것이지 인간을 못살게 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의 기본 단위는 가족이고 생존을 위한 기본 조건은 생업 유지다. 가족이 없고 생업이 없으면 종교 역시 그 의미가 약화되거나 유지될 수 없다.
감성 행복론
예술이나 문학의 창작, 또는 예술이나 문학작품의 감상과 같은 감성활동에서 행복을 느끼는 행복론이다. 감성 행복론은 여러 행복론 중에서 가장 자연스럽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과 같은 감각을 통해 있는 그대로 느끼는 데서 오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또한 감성 행복론은 사람이나 사회가 이성으로 지나치게 기울지 않도록 균형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공자의 ‘감성이 이성을 압도하면 야만스럽고 이성이 감성을 압도하면 융통성이 없어진다. 이성과 감성이 적절히 잘 섞인 뒤에야 우리는 그를 군자라 한다’는 말이나, 니체의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로 표현되는 ‘질서’와 ‘도취’의 균형은 바로 ‘이성’과 ‘감성’이 균형을 이룰 때 사람이든 작품이든 바람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이성에 너무 치우치면 질서는 있으나 경직될 것이고, 감성에 너무 치우치면 여유는 있으나 예측이 어렵게 될 것이다. 물론 이성과 감성의 균형은 감성으로만 너무 기울어서도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감성 행복론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진다. 예술 또는 문학 활동을 자신의 생업으로 삼는 것과 그것들을 취미로 하는 것이다. 예술 또는 문학 활동을 취미로 하는 것은 자신의 형편에 맞춰서 하면 된다. 따라서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예술 또는 문학 활동을 본업으로 하는 데는 몇 가지 문제가 따른다.
먼저, 예술·문학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반면에 예술·문학을 잘하기 위해서는 노력도 노력이지만 그 전에 감수성이나 창의성과 같은 타고난 소질이 매우 중요하다. 지문을 바꿀 수 없듯이 육체와 관련된 감성인 만큼 후천적 노력으로 감성을 향상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