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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r 22. 2018

05. 자기 철학이 필요한 시간 (마지막 회)

<오늘, 행복에 한 걸음 더 다가갑니다>



행복 로드맵을 만드는 데 있어 ‘질료인’, 즉 행복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재료’는 바로 ‘현재의 나’다. 우리는 행복 로드맵을 아리스토텔레스의 4가지 원인에 비추어 설계하고 있다. 바로 목적인, 형상인, 동력인 그리고 질료인 4가지다. ‘실내 장식’을 목적으로, ‘설계도면’에 그려진 형상에 따라, ‘대리석’을 재료로, ‘정으로 쪼는 작업’을 해 조각을 만든다면, ‘실내 장식’은 ‘목적인’, 조각의 ‘설계도면’은 ‘형상인’, ‘정으로 쪼는 작업’은 ‘동력인’ 그리고 ‘대리석’은 ‘질료인’이 된다.

그런데 조각을 만드는 데 있어서의 ‘질료인’인 ‘대리석’과, 행복가치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의 ‘질료인’인 ‘현재의 나’ 사이에는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다. 같은 점은 둘 다 각각의 목적을 위한 ‘재료’라는 것이고, 다른 점은 ‘대리석’은 이 세상 수많은 대리석 중에서 최고의 대리석을 선택할 수 있는 데 반해 ‘현재의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즉 조각을 할 때는 명작을 만들기 위해 처음부터 토스카나의 세계 최고 카라라(Carrara)산 대리석을 선택할 수 있고 또 당연히 그런 선택을 하겠지만, 자신의 행복가치를 실현하는 데는 그 재료가 다름 아닌 ‘현재의 나’로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좋으나 싫으나 ‘현재의 나’를 가지고 행복 실현을 하는 수밖에 없다. 난감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런데 다행스런 것은 인간인 ‘현재의 나’는 ‘대리석’과 달리 ‘의지’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행복 로드맵 작성 4단계 중 마지막인 ‘질료인-현재의 나’에서는 ‘나를 자신의 행복의 재료로 내놓는 것’ 자체와 함께, 자신의 의지를 활용하여 ‘나를 좋은 품질의 재료로 내놓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질료인-현재의 나’는 대리석을 조각의 재료로 내놓는 것처럼, ‘나를 자신의 행복의 재료로 내놓는 것’ 자체다. ‘나를 자신의 행복의 재료로 내놓는 것’은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중인 ‘행복 로드맵을 작성하는 것’이다. 즉 그냥 막연하게 ‘행복하게 살고 싶다’ 또는 ‘저 사람처럼 되면 너무 행복하겠다’와 같은 무계획적·무의지적인 태도로부터 벗어나, 행복 로드맵 작성을 통해 구체적·체계적·주도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막연하게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그야말로 막연하다.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비행기가 공항을 이륙하는 것과 다름없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의 ‘행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고민도 해보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 진짜 ‘행복’에 이르렀다면, 그것은 비행기가 네비게이터도 없이 되는 대로 날다 엔진 고장으로 아무 곳이나 비상착륙 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그곳이 바로 와이키키 해변이 펼쳐져 있는 하와이 공항 활주로인 것과 같다. ‘저 사람처럼 되면 너무 행복하겠다’라는 태도도 그와 마찬가지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하지만, 사실 입맛에 맞는 떡은 서로간에 제각각이다. 지문이 다르고 홍채가 다르듯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주요 행복가치 역시 모두 다르다. 부(富)가 커질수록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도덕적 행위 뒤 밀려오는 뿌듯한 마음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각자 자신만의 구체적·체계적·주도적 행복 설계가 필요하다. 즉, 자신의 ‘행복가치’(목적인)를 정하고, 그 가치를 가장 잘 실현시킬 수 있는 ‘직업(또는 취미)’ 또는 ‘삶의 모습’(형상인)을 정하고, 그 다음 그 ‘직업(또는 취미)’이나 ‘삶의 모습’으로 가기 위한 ‘학습과 노력’(동력인)을 정해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를 자신의 행복의 재료로 내놓는 것’ 자체, 즉 ‘질료인-현재의 나’ 단계다.

‘나를 좋은 품질의 재료로 내놓는 것’은 조각을 할 때 잡석과 다를 것 없는 허접한 대리석이 아닌 카라라산 대리석을 구해 조각을 하는 것과 같다. 카라라산 대리석으로 조각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잡석과 다름없는 대리석으로 조각을 한다면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졸작이거나 도중 작파다. 작업 도중 재료에 금이 갈 수도 있고 작품으로 완성되더라도 빛깔이나 결이 수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를 활용하여 ‘나를 좋은 품질의 재료로 내놓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바로 스스로 ‘철학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칸트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항상 ‘철학을 배우지 말고 철학하는 것을 배우라’고 했다. ‘철학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그리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신유학(Neo Confucianism)인 성리학을 연 주희(1130-1200)는 동양에서의 학문 출발 첫 단계인 ‘격물(格物)’을 ‘한 사물의 이치를 극진히 궁구하는 것(窮盡一物之理(궁진일물지리))’, 즉 ‘하나의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드는’ ‘궁리(窮理)’라고 하였다. ‘사물의 이치’는 ‘그 사물이 그렇게 존재하게 된 까닭(所以然之故(소이연지고), Why?)’과 ‘그 사물이 작용하는 법칙(所當然之則(소당연지칙), What?)’ 두 가지다. 주희 역시 칸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성을 활용하여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것도 끝까지 파고드는 자세로.


이성을 활용해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론은 바로 ‘논리’와 ‘사실’, 즉 연역법과 귀납법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데 ‘철학하는 자세’가 필요한 이유는 다름 아니다. 이성을 활용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선택한 행복가치가 아니면 그 행복가치는 수시로 바뀌기 쉽다. 그렇게 되면 흔들리는 과녁에 화살을 겨냥하는 것처럼 행복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자신의 삶의 모습과 노력 대상 역시 끊임없이 흔들려 결국 자신의 행복은 실현되지 못하게 되고 만다.

또한 각각의 행복론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철학하는 자세는 필요하다. ‘성공’이 넘쳐 방종, 심지어 자기 파괴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기 철학이 필요하고, ‘무소유’가 일시적인 도취가 아닌 지속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삶의 태도가 되기 위해 자기 철학이 필요하고, ‘이성 행복론’은 이성의 본질상 마땅히 자기 철학이 필요하고, 그리고 ‘도덕 행복론’ 역시 일시적 자기 만족이 아닌 진정한 행복이 되기 위해 자기 철학이 필요하다. 스스로를 공감시킬 수 있고 스스로를 붙들어 맬 수 있고 또 스스로 정한 행복가치가 자신의 진정한 가치로서 영속성을 갖는 데 ‘자기 철학’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그 ‘철학’은 바로 자신의 이성을 통한 논리적·사실적 검증 과정의 ‘철학하는 자세’를 통해 만들어진다.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BC63-AD14)는 ‘벽돌의 도시로 물려받은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로 물려주었다’라고 말했다. 세계의 수도, 세계 최고의 도시인 로마를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갈아입힌 자신의 업적에 대한 자부심의 표출이었다. 이때 로마의 모습을 화려하게 바꾼 대리석이 바로 순백으로 빛나는 카라라산 대리석이었다. 미켈란젤로(1475-1564)와 헨리 무어(1898-1986)가 즐겨 애용했던 바로 그 이름 높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의 카라라산 대리석이다.

자신의 행복가치 실현을 위해 자신을 재료로 내놓을 때, 스스로 ‘철학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은 옥타비아누스가 세계의 수도 로마를 꾸미기 위해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를 만들기 위해 그 재료로 카라라산 대리석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 로마가 완벽한 세계의 수도로 그리고 피에타가 완벽한 불멸의 명작으로 남은 것처럼, 우리의 행복 역시 완벽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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