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
<길례 언니> 시리즈는 1970년대 맑고 청순한 눈망울의 여인상으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여인상은 생존했던 실제 인물에 천경자의 환상이 결합된 청순한 처녀상이다.
1973년 무더운 여름날, 천경자는 둘째 딸을 모델로 하여 여인상을 그리다가 기억 속에 아련히 남아 있는 길례 언니를 떠올렸다. 그녀는 고흥공립보통학교 4년 선배로, 광주욱고녀 시절 방학을 맞아 고향에 왔다가 모교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뾰족구두에 노란 원피스, 챙이 달린 모자를 쓴 길례 언니가 일본인들 사이에 끼여 담소를 나누다가 화사하게 웃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순결한 눈망울과 뾰로통한 처녀 특유의 매혹적인 표정은 어린 천경자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길례 언니는 유행에 민감한 멋쟁이였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소록도 병원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이것이 천경자가 길례 언니에 대해서 아는 전부이다. 만약 길례 언니에 대해 속속들이 알았더라면 오히려 그녀에 대한 신비감이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길례 언니는 오직 천경자의 회상 속에서만 아름답게 살아 있는 영원한 처녀상인 것이다.
천경자는 길례 언니를 그리면서 그녀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현실에서 묻은 때를 정화시켰다. 그러다가 골치 아픈 일상의 일이 끼어들면 마음이 답답해져서 작품 속의 대상과 대화가 단절되고 속삭임과 혼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면 다시 몰입될 때까지 긴 시간 애를 태워야 했다. 길례 언니가 찰스 브론슨이 되거나 낯익은 목수의 얼굴이 되어버릴 때도 있었다. 상상 속에 남아 있는 순결하고 청순한 길례 언니의 표정을 재현하기 위해 천경자는 수십 번을 그렸다가 지우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노란 원피스에 청순한 눈망울을 가진 <길례 언니>는 그렇게 탄생되었다.
이렇게 청순해 보이는 길례 언니도 남모르는 고독과 슬픔이 있던 것일까. 작품 <고(孤)>에서 허공을 응시하는 여인의 눈빛은 희로애락의 격한 감정이 사그라지고 무심하여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비록 머리에는 예쁜 꽃으로 장식하고 있지만, 그 화려함 뒤에는 어쩔 수 없는 고독이 감추어져 있다. 이처럼 천경자에게 고독은 소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실존적인 차원이다.
천경자의 여인상들은 항상 머리에 화려한 꽃을 달고 있는데, 이것은 어린 시절 고향에서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니는 미친 여인들에서 착상한 것이다. 미쳤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 타인에 의해 억압되어 이성적 통제기능이 상실된 것이며, 상대를 굴복시키지 않고 스스로를 자학하고 고통을 감내하다 생긴 착하고 슬픈 질병이다. 교활하고 타인에게 폭력적인 사람은 결코 미치지 않는다. 미쳤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현실과 환상의 간극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슬픈 행복인가. 천경자는 이처럼 환상이 현실이 된 미친 여자들에게서 묘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이를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