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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pr 02. 2018

05. 객관적 평가란 심사위원의 주관적 판단이다.

<고수의 프레젠테이션 전략>



“이 친구 실적도 좋고 실무도 잘한다고는 들었는데, 지난번 프레젠테이션을 보니 아직 팀장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저도 그렇게 봤습니다. 일단 팀원으로서 실무를 더 하도록 두는 게 좋겠습니다.”
  
실제 승진자를 결정하는 회의에서의 대화 중 일부다. 상급자의 경우, 특히 직급의 차이가 많이 날수록 직원들 개개인의 능력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다. 따라서 한 번 노출된 프레젠테이션은 그 사람에 대한 기억으로 강하게 남는다. 변명할 기회도, 다시 한 번 해보겠다는 요청도 할 수 없다. 실제 많은 기업에서는 승진 후보자를 대상으로 특정 주제를 주고 프레젠테이션 심사를 실시하기도 한다. 또는 직원들의 프레젠테이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사내 프레젠테이션 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두 가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순위가 절대적으로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날 참가한 발표자 중 상대적으로 매겨진다는 것이다. 심사위원단은 1위부터 10위까지 어쨌거나 순위를 매겨야만 한다.
  
둘째는 심사위원들의 주관성이 많이 포함된다는 점이다. 물론 객관적인 심사 기준과 심사 항목이 미리 공지가 되겠지만 상대적 평가라는 것은 심사위원들에게 주관성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둘 중 누가 잘했느냐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의 에피소드에서 말했듯 모든 객관적 평가는 사실은 심사위원의 주관적 판단이 결정한다.
  
다음은 필자가 전문가 집단 앞에서 공감, 구성, 연출을 통해 베스트 프레젠터로 선정된 이야기다. 뭔가 와 닿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다국적 기업에 근무하고 있기에 전 세계의 직원들이 모이는 자리가 일 년에 한두 번씩 있었고 마침 각 나라의 기술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세일즈 프레젠테이션 대회가 개최되었다. 프레젠테이션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간혹 듣지만 정말 잘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잘한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자료도 없었다. 그래서 대회 소식을 듣자마자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는 생각에 과감하게 지원을 했다.
  
평가 내용과 심사 기준이 발표가 되었다. 요지는 청중들이 고객이라고 가정하고, 고객에게 우리 제품을 설명하는 식으로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심사위원은 청중 1,000여 명, 나와 동일한 업무를 하는 전문가들이었다. 요즘은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신선한 스마트폰 앱을 통한 현장 투표방식으로 순위를 매긴다고 했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영어’였다. 나의 영어 수준은 매우 낮은 편이었다. ‘띄엄띄엄 비즈니스 영어 정도나 할 수 있는 실력으로 영어권 사람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을까?’, ‘영어를 아무리 잘한다 해도 영어권 사람들에게는 떨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나 ‘말 잘한다고 프레젠테이션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를 증명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감 및 시나리오 구성
  
나는 먼저 다른 발표자들을 상상해 보았다. 아마도 모든 발표자들은 “Hello, Mr. Customer”로 시작할 것이다. 발표지침대로 청중을 고객으로 상상하고 진행할 것이고, 청중 또한 스스로 고객이라 상상하고 들을 것이다. 서로 상상하니 ‘공감’은 불가능할 것이고 다들 ‘공감하는 척’을 해야 하는 어려운 연기를 펼쳐야 한다. 죽을 맛이겠다 싶었다. 이번엔 내가 청중이 되어 보았다. 스스로를 고객으로 상상하기도 힘들고 앞에서 나를 고객 취급하는 사람들의 똑같은 발표를 계속 들을 생각을 하니 지루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바꾸어버렸다. ‘고객 앞에서 우리 제품을 설득하는 것, 고객을 설득하는 기술영업직들의 현실적 어려움과 대처 방법’으로. 그리고 거기에 맞게끔 콘텐츠를 준비했다. 주로 고객을 만났을 때 벌어지는 흥미로운 사건들과 재미있는 경험들을 중심으로 세 가지 정도를 준비하고 각각에서 명심할 교훈 하나씩을 뽑아냈다. 마지막 결론은 ‘우리 회사의 희망! 기술영업직에 종사하는 여러분! 자부심을 가집시다!”라고 끝을 내면서 박수를 유도할 계획이었다.



  
  
연출
  
모두 전문가이므로 아는 척해 봐야 역효과다. 이럴 땐 가르치는 입장보다는 같은 어려움을 겪는 동료, 매일 벌어지는 어려움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친구 같은 배역으로 포지셔닝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나도 너와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어, 친구. 그래도 나는 이 직업에 보람을 느껴. 우리 자부심을 갖자!’로 끝내기로 했다.
  
축제 같은 분위기가 예상이 되므로 진지한 분위기보다는 ‘웃겼다 진지했다’를 반복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문제는 내가 외국 사람들의 유머코드를 알기도 어렵고, 안다 해도 영어로 능숙하게 그 유머의 느낌을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몇 가지를 준비해 마침 한국에 근무하는 외국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친구가 재밌어하는 것만 골라 영어 문구를 수정한 다음 내 발표 대본에 넣었다.
  
  
연습
  
영어로 큰 무대에서 발표하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거의 한 달 동안 아침저녁으로 현장 분위기를 상상하며 계속 연습을 했다. “Ladies and Gentlemen”으로 시작하는 그 대본은 지금도 그대로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충분한 연습만이 떨지 않고 발표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다.
  
  
발표 당일
  
충분히 연습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발표 시간이 되니 미친 듯이 심장이 쿵쾅거렸다. 한국에서는 몇백 명 앞에 서는 것도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는데, 전 세계인들 1,000명 앞에 서는 것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엄청난 공포감을 주었다. 청중들을 쓰윽 둘러보니 여기저기서 최고 전문가들의 얼굴들이 들어오기 시작해 심장박동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때 나는 사람이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들고 있던 물병의 물이 심장박동에 따라 출렁거렸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심장을 어루만지며 겨우 마이크 앞에 섰다. 그리고 첫 마디를 시작했다.
“Hello everyone, I’m xxx from Korea. Not from the north! Don’t worry.”
  
아차, 준비하지도 않았던 North Korea, 북한이라는 말을 해버렸다. “망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이 말에 청중들의 폭소가 터져 나왔다. 당황스러웠지만 분위기가 한층 좋아졌다. 나중에 들은 내용이지만 당시 뉴스에 북한의 미사일 발사 뉴스가 몇 차례 나온 터라 청중들이 북한에 대해 예민한 상태였다고 한다. 다행히 폭소 덕에 나는 긴장도 풀리고 한국에서 하듯 줄줄 발표를 진행했다. 연출했던 대로 준비한 농담도 섞고 질문도 날리고 청중을 끌었다 당겼다 실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청중들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결론을 맺었다.
  
  
결과
  
발표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모르는 외국 사람들이 악수를 청해오고 잘 보았다, 감동적이었다는 말들을 해주었다. 느낌이 좋았다. 2일간 약 40여 명의 발표가 이어졌고 최종 집계 결과 월드와이드 챔피언, 1위를 차지했다.
  
그다음 해 대회는 한 번 해봤다고 더 이상 미칠 듯 떨리지는 않았다. 다시 1위를 차지했고, 그 뒤로 영어권 행사에 꾸준히 초정되어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게 되었다.
  

Note
1. 말 잘한다고 프레젠테이션을 잘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랬다면 미국친구나 영국친구가 1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2. 객관적 평가는 사실은 심사위원의 주관적 판단이다. 따라서 평가 항목 자체 보다는 그 평가 항목에 점수를 기입할 심사위원의 주관적 이유를 찾는 게 중요하다.
  
3. 평가 프레젠테이션에서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발표하는 것이 핵심이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들어야 하는 청중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 “눈에 띔”을 기억하자.
  
4. 청중과의 공감, 시나리오 구성, 잘 짜여진 연출은 언제나 명품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어내는 기본 요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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