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경제 재구성>
예전에 쓰던 작은 밥상, 소반을 기억하시나요? 형형색색의 반찬이 푸짐하게 차려진 큰 상이 아니라, 밥과 국, 김치, 나물 정도로 가짓수는 많지 않아도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는 소박한 상차림, 소반이 있었습니다. 가정경제도 소반을 차려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가정의 소득이 갑자기 반으로 줄었을 때를 가정하고, 과연 여러 가지 지출 항목 중에서 무엇을 줄일 수 있는지 계획해보는 훈련입니다. 일종의 가정경제 민방위훈련이죠.
지출 항목을 절반으로 줄여보는 가상의 소반훈련을 위해서는 우선 현재 우리가 얼마나 쓰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가정경제상담을 하다 보면 한 달에 얼마를 벌고, 얼마를 쓰는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가계부를 써보려 노력하지만 약발이 그리 오래가지 않죠. 우리 가정의 지출 패턴을 파악할 때는 통장 이체 내역과 카드 명세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 좋습니다.
1년 내내 억지로 가계부를 쓰려 하지 말고, 1년에 딱 한 번이라도 집중해서 3개월 정도의 카드 명세서를 항목별로 분류하고 월평균을 내보시기를 권합니다. 점검하다 보면 생각지도 않게 나가는 항목이나 꼭 필요하지 않은데 어느새 고정비용이 되어버린 대여비 등이 눈에 번쩍 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게 항목을 구체적으로 점검하고 나면, 무슨 항목에서 지출을 줄여갈 수 있는지 파악하고 실행하기 쉽습니다.
카드 명세서 지출 항목별 분류하기 & 월평균 내기 예시
변동지출(마트, 외식, 경조사비, 용돈)
일상의 자질구레한 지출을 없애고 식비와 외식비를 아낀다면 수십만 원 정도는 줄일 수 있지만, 소반훈련의 목표인 ‘지출 절반으로 줄이기’는 바로 한계에 봉착합니다. 더 이상 줄이기 어려운, 정말 포기하고 싶지 않은 ‘가치관과 삶의 질’을 선택하는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항목이 자녀 사교육비, 주거비(관리비, 대출 이자, 월세), 차량유지비(할부금 포함)입니다. 소득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상상은 끔찍하지만, 조금은 냉철하게 가상의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자녀 사교육비는 그 나이 또래에 당연히 지출해야 할 현실적인 비용일까요? 이는 부모의 교육관이 반영된 비용, 나아가 인생관의 문제인 동시에 ‘한 인격체로서 자녀의 삶’에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현재 모 대학교에 재학 중인 한 여학생은 중학교 때 부모님에게 “학원에 다니는 게 나와 맞지 않으니 부족한 과목만 친구들과 ‘방과 후 교실’로 보충하고, ‘자기주도학습’을 도전해보겠다”라고 했습니다. 부모는 불안했지만 딸의 당찬 도전을 믿고 응원해주었습니다. 여학생은 처음 몇 학기는 성적이 오르지 않아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공부한 결과, 성적이 조금씩 올랐습니다. 성취감을 맛본 여학생은 성적에 연연하기보다 즐겁게 공부하는 법을 터득했고, 소신 있게 지원한 대학교에도 합격했습니다.
반드시 자기주도학습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부모가 자녀에게 솔직히 가정경제 상황을 이야기해주고, 지원해줄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이고 한계는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부모와 자녀가 함께 재무 대화를 통해 사교육비 지출이 아닌 다른 방법을 모색하며 어려운 현실을 극복한다면, 이보다 훌륭한 가정 재무 교육이 따로 있을까요? 이와 같이 가정경제 자원을 재구성해보시기 바랍니다.
주거비나 차량유지비 역시 삶의 우선순위에 직면하면서 ‘결단의 의지와 방향’을 확인해봐야 합니다. 무리한 담보대출 원금과 이자를 감당하면서 넓은 평수의 새 아파트를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집을 줄여갈 것인가, 월세를 줄이고 작은 전세로 갈 것인가, 차량을 처분하고 할부금 없이 중고차를 타면서 최소한 아이들 대학자금 마련 저축을 유지할 것인가 등 가정의 상황에 맞춰 다양한 지출 항목과 재무 목표를 교환하면서 가정의 비상 경영 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정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재무적인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지출을 점검해야 함에도 막연히 ‘더 벌어서’ 소득만으로 해결하려는 가정이 많습니다. 재무 상담사로 지낸 만 10년 동안 참으로 다양한 사례를 만났습니다. 맞벌이를 하다가 갑자기 외벌이로 돌아선 대기업 직장인 부부, 갑작스러운 질병과 후유장애를 얻게 된 고액 연봉자, 강남에 빌딩이 두 채나 있었지만 사업 실패로 소형 화물차를 운전하고 있는 남성의 사연이 저의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세계 최고를 달리던 대기업 조선사들의 경영난으로 근로자들에게 닥친 구조조정과 하청회사의 연쇄 파업, 실업 등 요즘 뉴스를 보면 참으로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부정적인 변화에 대한 대비나 적응 훈련 없이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치면 ‘비경제적인’ 문제로 더 큰 타격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정서적인 혼란과 충격에 휩싸이고, 돈을 중심으로 보이지 않던 문제와 가족 간의 불편한 감정들이 드러나면서 갈등이 격화되기도 합니다. 중년 세대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퇴직으로 소득이 줄면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이 앞서 국민연금을 당겨 받거나 보험, 연금 등의 금융상품을 해약하는 등 재정적인 실수를 하고 맙니다.
그래서 소득이 절반으로 줄게 되었을 때(이미 줄었더라도)를 가정하는 소반훈련을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어떤 변화가 와도 사랑하는 가족과 가정경제만은 지킨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지나친 경각심으로 아버지/어머니/남편/아내만의 입장을 강요하거나 당장 생활비를 줄이자는 잔소리를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월 고정 지출을 줄여보려 노력할 때도 갑자기 큰 금액을 줄이려 하지 말고, 가족이 함께 공유하는 적정한 선, 지출 관리의 가이드 라인을 정한다 생각하면서 작은 금액이라도 줄여보세요. 최상의 상황을 희망하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지혜가 절실합니다.
성공이든 실패든 가족이 함께한다는 의지로 소반훈련에 임한다면, 장차 미래에 나이가 들어도 실제로 마주할 ‘소반’에 감사하고 만족하지 않을까요?
가족이 함께(1인 가구는 혼자서) 소반훈련을 실천해봅시다. A4 용지 한 장과 포스트잇을 준비합니다. 각자 다른 색의 포스트잇에 ‘정기적으로 지출하는 항목’을 하나씩 적어 A4 용지에 붙입니다. 그리고 다시 포스트잇을 떼어내고, A4 용지를 반으로 접습니다. 반으로 접으면 전에 붙였던 지출 항목을 모두 다 붙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때 어떤 지출 항목을 빼고, 어떤 지출 항목을 붙일 것인지 상의하고, 합의한 지출 항목 포스트잇을 붙입니다. 그리고 소반훈련을 통해 줄일 수 있는 지출 항목이 나왔다면, 언제부터 어떻게 실행하면 좋을지 선택하고 함께 결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