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신이 선물한 지중해를 품은 니스
여름 해는 길고도 길어서, 오랜 시간을 비행하고 늦은 저녁에 도착한 낯선 거리를 그리 헤매지 않았다. 어스름 검푸른 빛이 파고드는 해변, 수평선 너머 바다로 소멸하는 노을의 끝자락, 해안선을 물들인 불빛을 따라 긴 줄을 선 중세풍 건물들은 막연하게 그린 그림 그 이상이었다. 낯선 시선이 지중해의 저녁에 먼저 닿았다.
프랑스 남부의 아름다운 지중해. 햇살이 어루만지는 바다의 쪽빛은 축복이다. 쏟아지는 태양에 파도마저 바스라져 잠들고, 유유한 바다의 수평선은 하늘과 닿아 그 경계가 사라진다. 니스(Nice)는 나이스(Nice)다. 서쪽의 신시가지와 동쪽의 구시가지, 항구, 상업지구로 나뉘는 화강암 기슭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해안 도시. 신이 내린 쾌적한 날씨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선물일까. 계절의 변화에도 살갗에 스치는 바람의 결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사람이 나는 곳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신이 편애한 아름다움을 품고 사는 이들에게 작은 시샘이 생기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다.
지중해의 풍경은 화려하나 겸손하다. 아름다운 전신을 그리 쉽게 내보이지 않는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지중해와 도시를 파노라마로 담을 수 있는 샤토 언덕에 오른다. 낮은 곳부터 차근차근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그 아래에 망망히 펼쳐진, 시리도록 푸른 아름다움을 온전히 품을 수 있는 이 당연한 진리를 다리의 통증으로 깨닫는다.
언덕의 푸른 잔디에 작은 손수건 하나를 깔고 앉아 숨을 고르고, 하늘을 바라본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완벽한 프렌치 스타일로 변신이다. 달콤한 와인 한 잔을 마시면 더없이 좋겠다.
니스는 자신의 시적 내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샤갈(Marc Chagall)의 마을이자, 강렬한 색을 담은 마티즈(Henri Matisse)의 화실이기도 하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에 정착해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이유를 곱씹으며 그들이 칠해놓은 흔적에서 미학을 읽고 삶의 깊이를 더한다. 그들이 보았던 풍경에 심안을 덧대어 깊은 사유와 사색으로 지독한 그리움에 빠져드는 길을 걷는다. 은빛으로 퍼져가는 지중해의 먼 곳을 바라보며, 나는 끝없이 동경한다. 그리움을 그리워하다 보면, 어느새 그에게로 가는 작은 길이 내어지고 어딘가에 닿아있겠지.
거리로 나선다. 거리의 네모난 심장인 마세나 광장의 숨 쉬는 역사를 들여다보고, 그곳을 살아낸 사람들의 사연과 마주친다. 해마다 커다란 축제가 열리고 수많은 인파가 모여드는 광장. 2월에 열리는 꽃들의 행렬. 그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한바탕 신나게 뛰노는, 그 생경한 생동감을 그리고 그리워한다. 가끔은 나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애쓰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내가 살아가야 하는 공간들이 거추장스러울 때도 있다. 구속된 마음의 고난을 벗어버리고 이 축제 같은 도시에 잠시 마음 한 평을 내어 머물고 싶다. 소박한 자유를 그리는 것만으로 설렘이 차오른다.
격렬한 고뇌가 흐르는 론강의 아를
길은 다시 흐른다. 떼제베TGV를 타고 프로방스의 아비뇽(Avignon)으로, 그곳에서 다시 천천히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열차를 타고 작은 시골마을 아를(Arles)로 향한다. 누군가의 열정이 한 송이 해바라기로 피어난 작은 시골 역.
기차역 플랫폼에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홀로 걸어가는 한국 사람이 있다. 여리여리한 그녀의 몸에 그 커다란 가방은, 바라보는 나도 힘겹다. 이런 낯선 시골 역에서 만난 그녀가 무척이나 반갑다. 혼자 유럽을 여행 중이라던 그녀 또한 나를 만난 것이 반가운 모양이다. 서로 여기까지 온 여정들을 이야기하며 걷는다. 그녀의 지인은 “유럽에 가봐야 할 곳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작은 시골에 무엇이 볼 게 있어 찾아가느냐?”고 했단다. 그녀의 대답은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흔적을 찾아가는 길’. 플랫폼 끝에서 그녀와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며 각자의 길을 걷는다. 짧게 스쳐가는 인연에서도 여행의 온기가 느껴진다.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늘어선 아를의 거리로 들어선다. 아를의 기차역에서 머지않은 걸음을 걷다 보면, 좁은 골목 사이에서 빛바랜 고대 로마의 흔적을 만난다. 골목 저 끝에 고대 원형경기장의 한 자락이 걸려 있다. 길의 끝에 다다라 그 앞에 서보니 로마의 콜로세움처럼 압도할 만큼은 아니더라도 도무지 이 고요한 작은 마을에서 맞닥뜨릴 수 없을 것 같은 낯선 웅장함이 펼쳐진다.
4월과 9월에는 투우 경기가 열린다는 경기장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고 높은 곳에 올라 마을을 굽어본다. 길게 론강이 흐르는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 지방의 작은 마을 아를. 작지만 무수한 이야기를 간직한, 마음이 고단했던 고흐(Vincent van Gogh)가 사랑한 아를. 좁은 골목 사이사이, 작은 창가에서 외로운 빛이 새어 나오는 길을 품은 아를.
좁은 사색의 길을 걷는다. 누군가의 흔적을 찾아가는 걸음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풍광으로 눈을 밝히고 마음을 정화하는 걸음이 한 폭의 수채화라면, 지나온 시간과 공간에 짙게 배어 있는 향기로 심연을 채우며 걷는 길은, 맑은 그림 위에 유화 물감으로 덧칠하는 것과 같다.
한줄기 햇살만 허락한 좁은 길. 밖으로 열어젖힌 작은 창문. 벽에 걸린 외로운 가로등. 스쳐가는 모든 것들에 하나하나 의미를 담는다. 그렇게 걷다 미로 같은 골목에 연결된 작은 포럼 광장에서 고흐의 작품 속 ‘밤의 카페 테라스’를 만난다.
여행은 감동의 연속이다. 작품 속 카페를 만난 나는, 지나온 길에 사들고 온 그림엽서 속 카페와 눈앞에 열린 카페를 번갈아 바라본다. 고흐와 같은 시선으로 담기 위해 카메라 뷰파인더 속을 들여다보며 이리저리 몸을 움직인다. 카페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카르보나라와 맥주 한 잔을 주문한다. 상상했던 카르보나라가 아닌 두툼한 고기의 기름진 느끼함 때문에 다 먹기가 힘들었지만, 그가 바라봤던 그곳에 앉아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맛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그렇게 위로한다.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 별이 빛나는 푸른 밤, 카페 바깥의 풍경은 아름답고 매혹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고흐는 별을 그려 희망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자신의 삶은 고난이었지만 화가로서의 지치지 않는 열정을 밤하늘의 별을 통해 이야기한다. 현실 속의 카페보다 고흐의 그림 안에 있는 카페는 상상 속에서 아름답게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