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폭력>
저자 주
주로 여성들에게 경험담을 들은 관계로 이 책에서 언어폭력의 대상(피해자)을 언급할 때 여성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절대 여자는 남자에게 언어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단지 제가 남성들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했을 뿐입니다. 독자 여러분 중에 남성이면서도 관계를 개선하고 상대방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수없이 노력한 분, 이 책에 나온 여성들과 자신의 입장이 같다고 느껴지는 분은 본문에 나온 ‘남성’을 ‘여성’으로, ‘여성’을 ‘남성’으로 바꿔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언어폭력적 관계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가장 중요하고도 놀라운 사실은 학대자와 그 파트너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학대자의 세계관은 지배와 통제인 반면, 파트너의 세계관은 상호 존중과 상호 참여였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들이 분리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들이 사는 세계를 각각 A세계와 B세계라고 하자. A세계는 외적 권력을, B세계는 내면의 힘을 기반으로 움직인다. 다시 말해 지배와 통제로 힘을 느끼는 사람은 A세계에, 상호 존중과 상호 참여를 통해 힘을 느끼는 사람은 B세계에 사는 것이다.
A세계에 사는 것의 위험성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음에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B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B세계의 세계관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는 끊임없이 충돌하는 상반된 세계관 사이에 갇힌 채 공멸의 위기 속에 살아간다.
이러한 충돌과 분투에서 벗어나려면 서로 다른 두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만나 관계를 형성할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이해하고, A세계에 사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키워야 한다. 예를 들어 “전쟁 때나 사랑할 때는 어떤 행동도 용납된다”는 A세계식 사고관이다. 다음에 나오는 앤의 사례를 보면 관계를 맺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다.
학대자의 파트너가 A세계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 B세계로 넘어왔다면, 그녀에게는 A세계와 B세계를 구분하기가 무척 어려울 수 있다. 채 개구리가 되기도 전에 물 밖으로 나온 올챙이처럼, B세계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자존감을 갖추지 못한 채로 살고 있을 수도 있다.
나는 B세계에 사는 많은 여성이 A세계식 의사소통을— 마치 그것이 합리적인 대화라도 되는 양—그대로 받아들이고 응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앤의 사례를 읽어보자(학대 관계의 핵심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므로 여러 번 읽어두면 좋다).
앤은 B세계에 살고 있다. 그녀는 지(Zee)도 자기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는 다른 세계에 산다. 이 둘의 대화를 따라가 보면 앤이 A세계와 B세계 사이로 미끄러지는 과정 및 상대방도 자신과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가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가 방으로 들어와 앤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혼잣말인 듯 내뱉는다. “하여간, 전혀 도움이 안 된다니까!” (지는 A세계에 살며, 자기가 앤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앤이 다소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왜 그러냐고 묻는다. (앤은 지의 말을 진심이라 여기고 응답한다. 그녀는 지 역시 상호 존중을 원칙으로 한 B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그가 그렇게 말한 데는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지는 지배와 통제의 싸움을 시작할 태세다. 그가 보기에 앤은 이제 왜 그녀가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인지 마음을 열고 들으려고 하는 것 같다. 지는 분노의 기운과 알 듯 말 듯 한 승리감이 서린 말투로 대답한다. “내가 과일을 따고 있는 데도 전혀 돕질 않았잖아.”
앤은 이제 자신을 변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이 과일 따고 있는 줄 몰랐어.” 그러자 지가 재빨리 받아친다. “따고 있었거든!”
지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한다. 방금 외적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지가 앤이 지닌 자기관의 근본을 공격했을 때 그녀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고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지는 앤의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는 이제 기분이 매우 좋다.
같은 순간, 앤은 상처받고 좌절한다. 자신이 협력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지에게 납득시킬 수 없는 것 같다. 앤은 위축되고, 지가 그녀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왜 과일을 딴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 앤은 이 모든 대화가 사실은 과일 따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녀는 지가 사는 세상에 대해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지는 앤에게 늘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그녀에게 사랑이란 서로를 북돋아 주는 것이지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앤이 “내가 당신을 돕지 않으려고 한다고? 그렇게 말하다니 속상하네”라고 이야기하면 학대자인 지는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또 난리네” 혹은 (비꼬는 말투로) “뭐,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시다면야. 내가 아주 죽을죄를 지었네”라며 그녀의 감정을 별것 아닌 것으로 축소시킬 것이고, 앤은 혼란스럽고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만약 지가 B세계에 살고 있었다면, 그는 “아, 정말 미안. 내가 말 안 해도 과일 따는 걸 당신이 알고 도와주길 바랐었나 봐”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지가 못되게 굴긴 했지만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할 것이다.
한편, 앤이 B세계에서 자랐다면 그녀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지의 말에 어떠한 근거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따라서 지가 그녀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즉시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라고 대응했을 것이다. 자신이 협조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비난도 받아들이지 않고, 왜 그에게 그 사실을 이해시킬 수 없는지 괴로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지에게는 앤을 이해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음을 알 것이다. 지는 앤을 이해하기보다 그녀를 이기기에 더 관심이 많다. 지가 사는 A세계에서는 그것이 힘을 느끼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런 힘은 ‘내면의 힘’이 아니다. 남을 제압해서 얻는 힘은 ‘외적 권력’이고, 그것은 ‘훔친 힘’이다. A세계에서는 힘을 행사할 대상이 없는 사람은 아무 힘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