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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pr 24. 2018

04. 생리 얼룩이 어때서?

<생리 공감>



피가 흐르면 흐르는 대로

모두가 생리대를 차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아주 먼 옛날 사냥과 채집을 하던 유목민들은 이끼, 나뭇잎 심지어는 토끼털을 벗겨 흐르는 피를 처리했다. 풀이나 솜으로 탐폰을 만들어 사용한 흔적도 여러 문화권에서 나타난다. 어느 곳에 사느냐에 따라 여성들이 피를 대하는 자세도 다른 듯하다. <피의 연대기> 조연출의 친구가 싱가포르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같은 아시아권인데도 싱가포르에서는 탐폰 사용 인구가 훨씬 높다고 했다. 조연출의 친구는 그 이유를 ‘날씨가 너무 더워서 생리대를 차기 힘들기 때문은 아닐까’라고 분석했다. 이집트나 하와이 같은 지역에서 일찍이 탐폰을 만들어 쓴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모두가 애써서 피를 처리한 것은 아니었다. 역사의 어떤 시점에는 피가 그저 옷에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둔 적도 있었다.


‘생리 박물관(Museum of Menstruation)’. 번듯한 건물에 들어선, 오프라인 박물관은 아니다. 온라인 박물관이다. 하지만 박물관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생리에 대한 자료가 방대하다. 그곳에서 나는 재미있는 사례를 발견했다. 19세기 유럽 농촌 지역 여성들은 생리대를 차지 않았다. 생리를 처리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이 걸어 다니는 자리에는 그대로 생리혈이 떨어져 있었다. 팬티를 입으면 그 정도까지는 흘러내리지 않을 텐데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요네하라 마리의 《팬티 인문학》을 보면 인류가 속옷을 입기 시작한 건 전체 인류 역사에서 최근의 일이다. 당시 속옷은 생필품이라기보다 여유 있는 사람들이 입는 일종의 기호 용품이었다. 농촌 지역 상당수 여성은 속옷을 입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랬다면 생리대를 찬다는 개념도 없었으리라. 그러니 그저 피가 흐르면 흐르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현대 여성들처럼 한 달에 한 번 일주일에 거쳐 많은 양의 피를 흘렸다면 피를 그저 흘러내리도록 놔두지 못했을 것이다. 너무 불편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여성들은 늦게 초경을 시작했고 빨리 결혼을 하고 임신을 했기 때문에 우리만큼 많은 피를 흘릴 필요가 없었다. 아이를 임신하고 모유 수유를 하는 동안은 피를 흘릴 필요가 없었고 그 뒤로 죽을 때까지 아이를 낳다가 완경을 겪기도 전에 사망했다. 어쩌면 그들에게 생리는 몇 년에 한 주기씩 돌아오는 거추장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주기적으로 이 피를 처리하기 위해 애쓰기보다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남자들 반응은 어땠을까? 집 안의 다른 사람들은 그 피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피가 흐르는 것을 더럽거나 불경한 일로 여겼다면 무슨 조치든 취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흘러내리는 피는 몇 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일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둬도 무방한.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과거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아보면서 내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일에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할머니의 피 묻은 생리대를 빨아야 했던 이모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가 흘리는 피나 남이 흘리는 피가 전처럼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촬영 기간 동안 ‘실제’ 생리혈이 필요한 적이 많았는데 제작진 모두가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니 생리가 너무 늦어져 촬영 때를 놓치거나 갑자기 터져 촬영을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피가 모자라서 영화를 찍을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다.


다행히 생리컵을 사용한 지 얼마 안 된 촬영감독의 생리 주기가 돌아와 촬영감독의 생리혈을 찍기로 했다. 생리컵에서 바로 뺀 뒤 볼 수 있는 생리혈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간 촬영감독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남의 생리혈을 보다니. 뭔가 이전까지 허락되지 않았던 걸 볼 수 있게 된 기분이었다. 본격적으로 생리가 시작되기 전 이어서일까. 양이 많지 않았고, 내가 생리컵 쓸 때 보았던 ‘새빨간’ 색도 아니었다. 하지만 촬영감독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생리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고 우리는 그 모습을 촬영했다. 아쉽게도 데이터 관리를 잘못해(나의 실수) 그 영상은 사라졌다.

    

생리 얼룩이 어때서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는 피를 그저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더는 생리가 부끄럽지 않았다. 팬티에 묻거나 옷에 묻어도 그러려니 했다. 물론 그 옷을 빨고 얼룩을 제거해야 하는 노동은 여전히 귀찮다. 그렇지만 생리 끝물에 잠시 컵을 끼우지 않았다가 팬티나 면 팬티라이너에 묻은 피 얼룩이 다 제거되지 않아도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한다. 어차피 이 피는 멈추게 할 수 없고, 그 피가 팬티에 얼룩으로 남는 것 또한 내 잘못이 아니니까. 다음 달에도 흘릴 피니, 굳이 강박적으로 얼룩을 지우려 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얼마 전 내 빨래를 도와주던 남자친구가 방금 세탁기에서 꺼냈으나 여전히 시커먼 얼룩이 묻어 있는 팬티를 들어 보이며 다시 빨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아, 그거 생리 얼룩이야 어차피 안 지워져”라고 대답했다. 남자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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