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May 29. 2018

02. 작은 판매대에서 시작하여 기업을 일으키다.

<징둥닷컴 이야기>



1998년 6월 18일, 24세 청년 류창둥은 2년 동안 일해 틈틈이 모은 1만 2,000위안(약 200만 원)으로 중관춘(中關村, 중국의 실리콘밸리라 불림)의 하이카이(海開) 시장에 있는 4㎡(1.21평)의 판매대를 빌렸다. 그리고 중고 컴퓨터 한 대와 중고 삼륜차 한 대를 구입하고 홀로 창업의 길로 들어섰는데, 이것이 바로 징둥의 전신인 징둥멀티미디어(京東多媒體)의 시작이었다.


1998년 당시 중국은 한창 경기가 활기를 띠면서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반면에 집체소유제기업(集體所有制企業, 지방정부 및 경제무역기구가 공동출자·공동경영·공동책임을 지는 기업형태)과 국유기업의 직원이 대량으로 퇴출되면서 과거 ‘철밥통’이라 불리던 안정적인 직장이 사라지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개인과 민간자본으로 이루어진 민영기업이 기지개를 활짝 펴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 가장 뜨거운 창업 열풍이 분 곳은 3개 지역이다. 바로 주장(珠江) 삼각주와 원저우(溫洲)를 중심으로 한 저장(浙江)지역, 그리고 중관춘이었다. 주장삼각주와 저장지역에는 해외무역업과 가공업이 주로 둥지를 틀고 있었으며 중관춘은 지식인과 엘리트층의 요람으로 불리며 IT산업 위주의 창업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1988년부터 1998년까지 중관춘은 신생기업이 매일 최소한 하나 이상 생길 정도로 급속한 성장세를 보였다.
  
이렇듯 그 당시에는 중관춘을 중심으로 거센 인터넷 붐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힘입어 여러 해 동안 날개를 펴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던 중국 경제는 닫았던 문호를 하루아침에 활짝 열게 된다. 이로써 중국은 드디어 인터넷이라는 세계적인 최첨단 흐름에 보조를 맞추기 시작한다. 하이구이(海歸, 해외 유학파로서 귀국하여 창업한 청년을 일컫는 신조어)였던 장차오양(張朝陽)은 써우후(搜狐, 검색포털사이트)의 창업자로서 1998년에 <타임> 지가 선정한 ‘전 세계 디지털 유력인사 50인’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 시기에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산업 가운데 가장 각광을 받았던 분야는 인터넷 포털사이트다. 이 중에 써우후와 신랑(新浪), 왕이(網易, 검색포털 163.com을 운영하는 회사)는 순식간에 인터넷시장을 장악하며 명성을 드높이기 시작했다. 또한 태평양 너머의 떠오르는 샛별을 꼽으라면 단연 양즈위안(楊致遠)이 창업한‘야후’였다. 야후는 1996년 상장한 이래 월스트리트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2000년에 이르러 드디어 최고의 주가를 기록하게 된다.
  
1998년은 구글이 막 창업을 시작한 해였다. 이와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국의 바이두(baidu.com)는 2000년이 되어서야 그 모습을 처음 드러냈다. ‘QICQ’메신저로 더 잘 알려진 텅쉰은 당시 선전(深川)에 자리 잡고 있던‘작은 펭귄’(텅쉰의 상징적 마스코트)에 불과했다. 마윈(馬雲, 알리바바 창업주)은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 옐로우 페이지’사업에 한창 여념이 없었다. 훗날 마윈이 창업한 알리바바(阿里巴巴,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사이트)는 당시로선 아직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향후 중국 인터넷시장을 3대 거두인 BAT(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의 앞 영문글자를 딴 용어)가 장악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징둥이 BAT의 뒤를 이어 4대 인터넷기업으로 급부상하리라곤 더더욱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1998년 창업 당시 류창둥은 전형적으로 오프라인 채널을 통해서만 판매했다. 쉽게 말하면 판매대에 제품을 진열하여 판매하는 형태다. 그렇게 처음에는 도매업을 하다가 나중에는 소매업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런데 이 시기에 미국은 소매유통업의 역사가 오래되어 시장이 이미 성숙한 발전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한때 미국 내 최대 매출액을 기록했던 시어스(Sears, 미국의 세계적인 소매업체)는 일찍이 1884년에 세워진 회사다. 1962년에 설립된 월마트는 1993년에 시어스를 누르고 미국 최대 소매유통업체로 성장하여 1998년에 매출액이 1,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반면에 개방형 시장경제로 들어선 지 몇 년 되지 않았던 당시 중국의 소매유통업은 막 시장이 형성되는 초기단계였다. 그런데다 정치적 요인까지 가세해 다년간 소비자 수요가 위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억눌렸던 수요가 일시에 폭발했고 수요 급증으로 인해 ‘판매자 주도’의 시장이 형성된다. 시장에서는 폭리현상이 나타났으며, 혼란과 무질서가 팽배했을 뿐만 아니라 사기와 부정부패 현상까지 만연했다.
  
중관춘의 크고 작은 매장들은 중국 소매유통시장의 그런 혼돈 양상을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곳이었다. 모조품, 일명 ‘짝퉁’이 정품과 뒤섞여 판매되면서 구분하기 어려워졌고, 소비자들은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대로 된 정품을 구매할 수 없었다. 소비자들이 믿을 거라곤 오로지 자신의 짧은 안목뿐이었고, 어쩔 수 없이 가격흥정으로 제품을 구입했다. 자칫하다간 ‘베테랑’판매사원들의 밥이 되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징둥멀티미디어는 이렇게 다소 뒤얽힌 복잡한 환경에서 출발했다.
  
류창둥의 운영방식은 중관춘의 다른 판매점과는 확연히 달랐다. 뾰족한 거래선을 확보한 것도 아니었고 자금도 부족했다. 게다가 아직 단골도 확보하지 못했고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매장을 운영해야 했다. 그렇지만 징둥은 다른 판매점과는 달리 ‘정찰제’판매를 고수했고 가격흥정도 거부했다. 흥정 자체가 되지 않으니 고개를 저으며 그냥 발길을 돌리는 고객도 상당수였다. 그래도 징둥의 합리적인 가격 덕분인지 다른 매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징둥은 98위안의 첫 거래를 성사시킨 이후 조금씩 입소문이 나면서 차근차근 단골고객을 늘려나갔다. 개업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으며, 그제야 직원 한 명을 새로 채용하게 된다.
  
징둥멀티미디어는 사업 초창기에 웨딩촬영 동영상 편집 관련 하드웨어와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일을 했다. 회사규모가 조금 커지자 하이카이 시장의 모퉁이 코너에서 베이징 구이구전자상가(北京硅谷電腦城,‘구이구(硅谷)’는 실리콘밸리라는 뜻) 맞은편에 위치한 베이다쯔윈(北大資源) 빌딩으로 옮겨와 2425와 2426, 2427호의 세 개 사무실을 임대했다. 이 무렵에 판매제품의 종류에 변화를 주기 시작하여, 광자기디스크 제품과 CD-RW, 비디오테이프 변환시스템 등을 취급하게 된다. 이 가운데 70%는 중관춘의 전자상가 매장에 공급했으며 나머지 30% 정도만 자체 매장에서 일반 소비자에게 판매했다. 2002년부터는 베이징 구이구전자상가 3층에 매장을 오픈하고 제품군을 확장하여 CD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매장 내의 판매대를 통한 영업은 제법 성과가 좋았다. 10명 중에 최소 7~8명이 구매했으니 거래성사율이 높은 편이라 할 수 있었는데, 단순히 제품만 판매한 게 아니라 기술서비스도 함께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류창둥은 미래의 징둥상청(京東商城, 국내에는‘JD닷컴’으로 알려져 있으며 2018년 현재 중국 전자상거래 2위 업체)을 위한 발판을 다지고 있었다. 훗날 등장한 징둥상청은 이러한 판매정책과 서비스를 토대로 쉼 없이 노력해 일궈낸 회사라 할 수 있다.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한 길을 고수해서 이뤄낸 성과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05. 예측 적중률을 높이는 5단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