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주역은 인간에 대한 신의 배려이다.

<불안과 함께 살아지다>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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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성술에 심취해 있던 한 수학자가 점성술의 신빙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고 날짜에 맞춰 자살을 했다고 한다. 별의 예언이 미래를 맞춘 것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의지가 과거를 따른 ‘뒤돌아선 예언’이었던 셈이다.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 점을 친다지만, 실상 점을 쳤던 과거를 뒤돌아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며, 다가오는 우연을 예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공시된 필연의 강박을 살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지구에서의 시간을 별의 의지로 살아가려 하는가? 고귀한 자신의 시간을 귀신의 충고대로 살아가려 하는가? 인생의 매 순간을, 태어난 시각에 묶어둔 예언으로 살아가려 하는가? 그토록 쉽게 천기가 누설될 정도로 신은 불완전한 존재일까?

고대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에서 그리스인들에게 내려지는 신탁은, 은유적이고 중의적인,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뜻이 달라질 수 있는 애매한 문장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동양의 《주역》이란 텍스트의 성격 또한 이렇다. 점괘를 뽑은 사람이 알아서 판단해야 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점괘는 언제나 맞을 수밖에 없다. 해석의 선택과 실천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점괘의 은유와 중의가 걸치고 있는 범주이기 때문이다. 《주역》이 지니고 있는 브랜드 가치를 생각한다면, 사전적 해석과 사후적 해석의 불일치는 미덥지 못한 인간의 지력을 탓해야 하는 구도이다.

신은 ‘말씀’으로 모든 걸 이루어냈는지 몰라도, 우리는 그 ‘말씀’이 이루어낸 일부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의 문법으로는 신의 문법을 이해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애매한 이 신의 문법은, 결국 인간에 대한 신의 배려인 셈이기도 하다. 인간 저 스스로 삶을 헤쳐 나아갈 수 있는 지혜를 기르도록 한…. 《주역》은 뽑은 점괘가 나의 운명이라는 논리가 아니라, 나의 운명이 그 점괘를 뽑는다는 논리이다. 뭐가 어떻게 다른 말인가 싶겠지만, 숙명보다 의지가 앞선다는 의미이다.

tja.jpg?type=w1200 박성열, , 65.2x91cm, oil on canvas, 2009. © GALLERY SOHEON & SOHEON Contemporary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시대의 일기예보는 예측이 아니다. 인공위성으로 시야를 넓힌 관측일 뿐이다. 옛사람들에게 기후는 예측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항해 도중 갑작스럽게 만나는 자연의 변화는 예측능력 밖의 사안이었다. 관측의 능력이 닿지 않는 지점에서 예측이 시작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관측과 예측의 범주도 변해왔다. 과학과 역술 역시 감지능력의 확대에 따라 그 위상이 달라졌다. 변하지 않는 사실은, 모르는 것들은 하늘에게 맡기고, 알 수 있는 것들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간의 주체적 의지뿐이다.

숙명론 앞에서는 선택이란 행위가 무의미해진다. 믿음으로 굳어진 체념이 앞서 있을 뿐이다. 예측할 수 없는 우연 앞에 던져졌을 때만이, 선택의 가능성도 함께 주어진다. 항해 도중 예상치 못한 태풍을 만났다면,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죽겠는가? 아니면 온 힘을 다해 살아남겠는가? 방향타를 붙잡고 있는 순간, 그것은 의지가 삶으로 기운 항해이지만 죽음의 확률에서 비껴가지 않을 수도 있다. 방향타를 놓아주는 순간, 요행의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삶을 향한 의지는 사라진, 죽음으로 향해가는 표류이다. 살고 죽는 문제 역시 우연이다. 그러나 삶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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