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그만두고 유학을 갑니다>
포트폴리오는 어떻게 만들었어?
미술 유학을 준비하면서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당연히 포트폴리오였다. 영어 성적? 영문 자기소개서? 일단 낯설지는 않았다. 그런데 포트폴리오 제출 요건을 읽다 보니 등에 줄줄 식은땀이 흘렀다.
나도 모르게 아찔해졌다. 이건 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다급한 마음에 ‘유학 포트폴리오’를 검색했다. 유학원과 포트폴리오 학원에서 올린 광고가 주르르 떴다. 광고는 친절하게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수능과 대학입시보다 더 어려운 미술 포트폴리오를 과연 네가 혼자 만들 수 있을까? 학원으로 와. 그게 더 빠르고 편해.’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합격 예시와 후기를 읽어보니 비싸더라도 지금 당장 학원을 다녀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당장 상담 예약을 하고 학원을 찾아갔다. 주로 고등학생의 어머니를 상대하는 실장은 나를 보자 살짝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내 돈을 써야 하니 비싼 학원비가 마음에 걸려 이것저것 귀찮게 계속 물어봤지만 결국 속 시원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단지 다음 달 수업시간표와 미대 순위표만 손에 쥐었을 뿐.
학원에서 언뜻 보여준 합격생 포트폴리오는 대단했다. 하지만 어떤 학생의 잠재력이라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실장의 과장된 목소리가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그렇게 쉬운 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나는 그렇게 현실적인 조건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뭐가 뭔지 판단할 수 있는 눈치는 있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학원에서 들은 말을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답답해서 이미 오래전에 유학을 떠나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친구에게 물었다.
“입학 포트폴리오 어떻게 만들었어?”
대답은 간결했다.
“학교에서 만들었지.”
친구의 말은 냉장고에 코끼리 넣는 방법과 비슷했다.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넣는다. 냉장고 문을 닫는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그래도 혼자 준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잘나서 모든 과정을 혼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유학 가서 쓸 돈을 아끼고 싶은 소심한 마음 때문이었다. 매일 마시는 커피값 계산해가며 힘들게 모은 돈인데 학원비에 펑펑 쓸 수는 없었다. 돈을 떠올리면 물감 한 개 쉽게 사기 어려웠고 비싼 수입지는 만지작거리다가 포기하곤 했는데 출발선에 서기도 전에 빈털터리가 될 수는 없지. 유학생활에 돈이 얼마나 들지도 모르니 떠나기 전까지 혼자 준비해보자고 결심했다. 물론 준비 기간 내내 방향 없이 달리는 마라토너가 된 느낌이었지만 이왕 달리기 시작했으니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현실과 욕망 사이에서 ―
캐나다 대학에 지원하다.
“파인아트, 순수미술 멋있잖아!”
그래 멋있지. 하지만 그 후에는?
포트폴리오를 한창 준비하고 있는데 어떤 전공을 할지 정하지 못했다. 캐나다로 떠나는 건 확실했다. 결혼한 학생의 배우자에게 취업비자를 주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캐나다에서는 남편에게 취업비자를 주었기 때문이다. 또 영어 이외에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위해 시간을 더 쓰고 싶지 않았다. 세계 지도를 보며 각 나라의 비자 제도를 조사하고 학비를 검색하며 하나씩 지워나가니 캐나다만큼 좋은 조건을 가진 곳이 없었다.
캐나다는 2년제 이상 공립대학을 졸업한 외국인에게 최대 3년의 취업비자를 주고 있다. 각 주마다 세부 조건은 다르지만 3년 중 1년 이상 풀타임으로 일한 후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다. 나는 그 가능성을 열어놓고 싶어서 캐나다를 선택했다. 만약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캐나다의 삶이 더 힘들고 불행하면 굳이 영주권을 따기 위해 몇 년을 희생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반대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고 계속 남아 있고 싶을 때 문이 열려 있길 바랐다.
캐나다로 유학 장소를 정한 이후에도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3차 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캐나다에서는 미술계 취업이 어렵다’는 포트폴리오 학원 실장의 단호한 말이 계속 떠올랐다. 내 주변에도 캐나다로 유학 간 사람은 MBA 혹은 미술과 상관없는 전공을 공부하기 위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몇 개 유명한 미대는 있지만 확실히 미국의 명문대에 비해 인기가 떨어졌다. 졸업을 한다고 해도 취업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면 한국에 돌아와서 인정받아야 하니 다들 누구나 알 만한 학교를 가고 싶어 했다. 반대로 캐나다도 나름 장점이 있다. 미국, 영국등 주로 유학생들이 모이는 나라에 비해 학비가 저렴하다. 공부를 하면서 일할 수 있다. 하지만 정보가 없었다.
전공을 당장 정하려니 어려워서 커리큘럼을 찾았다. 캐나다의 4년제 미술대학에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1년의 파운데이션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1년 동안 세부 전공을 정하지 않고 듣고 싶은 수업을 선택하고 다양한 스튜디오 코스에 참여할 수 있다. 2학년 때는 전공 방향을 정하지만 프로젝트를 위해 다른 전공 수업도 듣게 된다. 그리고 3, 4학년 동안 집중적으로 개인 작업을 하고 졸업전시회를 한다. 언뜻 보니 4년제 미술대학에 들어가면 세부전공을 당장 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4년을 온전히 공부하기 위해 써도 될지 걱정이었다. 4년 뒤면 내 나이가 얼만데.
내 마음 한쪽에서는 그 소중한 시간을 간절히 바라는 욕망이 있었다. 몇 년 동안 미술만 생각하며 살면 얼마나 좋을지, 그리고 내 아이디어가 발전하고 깨지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과정이 얼마나 짜릿할지 상상만으로도 행복했다.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볼 수 있는 개인용 스튜디오와 졸업 작품들을 보면 질투가 났다. 캐나다에서 미술로 취업을 못하면 한국에 돌아와야 하고 지옥 같은 업무 환경을 가진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미술만 생각하며 보낸 4년 동안의 경험이 나에게 어떻게 남을지 궁금했다.
동시에 디자인도 공부하고 싶었다. 세상에는 멋진 디자이너가 너무나 많다. 그들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도, 다양한 문제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과정도 멋지다. 특히 내가 살아온 문화가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공부하면 내가 가진 경험이 다양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취업률이 높은 2년제 컬리지도 같이 찾아보기 시작했다.
캐나다의 각 주에는 그곳을 대표할 만한 컬리지가 있다. 학과도 매우 많고 6개월에서 2년까지 기간도 다양하다. 수요에 따라 학과가 개설되기도 하고 폐지되기도 하고 가끔 (영주권자 이상에게만 해당되는) 무료 전공이 생기기도 한다. 학비는 주에 따라 다르지만 4년제 대학보다는 저렴하며 다양한 장학금에 국제학생도 지원할 수 있다. 인터뷰 영상이나 입학 자료를 보면 학생의 연령대가 다양하다. 주로 일을 하다가 추가로 필요한 지식이 있거나 커리어를 바꾸고 싶은 현지인들이 컬리지를 많이 가는 듯하다.
디자인 전공은 그래픽 디자인과 웹디자인 위주로 개설되어 있고 입학 포트폴리오에 드로잉, 페인팅뿐 아니라 로고나 간단한 프린트물을 제작하는 과제가 포함된 경우가 있다.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그리더라도 반드시 스캔을 해서 파일로 제출해야 한다. 컬리지에서는 2년 동안 취업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고 졸업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때문에 커리큘럼이 빡빡하고 마지막 학기에는 대부분 인턴십이 포함되어 있다.
결국 4년제 대학과 2년제 컬리지에 모두 지원하고 마지막에 결정하기로 했다. 누군가의 삶이 다른 이에게 정답이 될 수 없다. 내 선택이 미래의 나에게 최선이라는 보장도 없고 후회를 해도 과거는 변하지 않는다. 눈앞에 주어진 선택지를 저울에 올려놓고 결과를 감당할 용기를 얻는 시간은 나름 의미가 있었다. 그 시간을 통해 인생의 한 부분을 돌아가게 되더라도 결국 큰길에서 다시 만날 거라는 작은 확신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