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그만두고 유학을 갑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눈이 많이 온다. 정신없이 숙제를 하다가 주변이 조용해져 창밖을 내다보면 어김없이 세상이 온통 하얗다. 처음엔 예고 없이 내리는 눈송이가 예뻐서 마냥 좋아했는데 요즘엔 ‘내일 아침에 차를 무사히 뺄 수 있을지’ 걱정하며, 귀찮지만 지금이라도 나가서 눈을 치울까 고민한다. 가끔 눈과 함께 거센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면 전기가 끊기기 전에 아이스박스와 손전등을 확인해야 편하게 잘 수 있다. 눈이 많이 와서 도로와 도보가 구분이 안 될 때는 아침 6시에 학교에서 보내는 메일을 꼭 확인해야 한다. 도로 사정이 악화되고 제설작업이 늦어지면 예외 없이 하루 수업이 모두 취소되기 때문이다. 캐나다 학생들은 수업이 없으니 놀 수 있어서 좋아하지만 그들보다 몇 배 이상 비싼 등록금을 내는 나 같은 국제학생들은 학교가 닫으면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 든다.
첫 학기를 마쳤을 때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 있었다. 밤새 과제를 하고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면 잠깐 쪽잠을 자고 다시 밤을 새우는 하루가 반복됐다. 주말 하루는 잠을 몰아서 자고 일주일치 장을 봤다. 고3 시절 엄마가 아침마다 싸주던 도시락에는 정성이 많이 들어갔는데, 내 도시락은 대충 만든 샌드위치나 볶음밥일 때가 많았다. 미리 싸온 커피를 한 사발 들이켜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사람들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매일 그렇게 영어를 듣고 쓰는데도 생각만큼 실력이 확 늘지 않았다. 대신 눈치가 많이 늘었다.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취업 이야기가 들리면서 내가 이곳에 남으려면 캐나다 학생들보다 훨씬 노력해야 하는 현실을 깨달았다. 실력과 인맥 두 가지 모두 잘 갖춰야 한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과제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가져와서 했다. 쉴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돈도 없고 수다 떨 수 있는 한국친구도 없으니까.
내 일상을 누군가 들여다보면 대체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고 물을 것 같다. 나도 한국에서 나름 편하게 직장생활을 하며 우아하게 취미를 즐기던 모습과 비교하면, 하루에 12시간씩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혹시 전기가 끊길까 걱정하는 지금의 내 몰골이 형편없게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캐나다는 미세먼지 없는 맑은 공기를 항상 마실 수 있고 물가도 한국만큼 비싸지 않고 사람들도 대부분 친절해서 크게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다. 그저 내가 외국인이고,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하고, 농담을 못 알아들어 분위기를 망칠 때가 있는 게 문제다. “넌 포스터는 잘 만들면서 왜 계속 문장에서 관사를 빼먹는 거야?”라는 랍 선생님의 핀잔을 애써 웃으며 넘겨야 할 때도 많다. 이 정도면 대충 넘어가거나 우린 친구니까 서로 봐주자는 식이 통할 리도 없다. 나에게 한국 음식의 레시피를 물어볼 때의 친절함은 일 얘기를 할 때면 쏙 들어간다. “외국인이라고 봐주는 거 없어. 그래야 너도 편하지?” 그들의 단호한 말에 겉으로는 고객을 끄덕이지만 마음속으로 ‘아니, 안 편해’라고 대답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전반적으로 행복해졌다. 누가 나를 ‘행복함’과 ‘안 행복함’이 양쪽에 달린 저울에 올려놓고 “넌 객관적으로 불행해졌어”라고 얘기해도 “아니야, 나는 행복해”라고 우길 수 있는 정도의 자신감은 있다. 유학생활에는 이국적인 배경의 여행지와 외국인 친구들 사이에 활짝 웃는 사진으로 판단할 수 없는 매일의 고단함이 존재한다. 하루하루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억울한 유학생은 화장실에서 혼자 끅끅 울음을 참아야 하기도 한다. 그렇게 매일 넘어지지만 다행히 그 경험치는 차곡차곡 쌓여 고스란히 내 것이 된다. 만약 내가 그때 회사를 그만둘 결심을 못했거나 유학이 아닌 다른 방법을 선택해서 안정적인 길을 찾았더라면 절대 얻지 못했을 지식과 경험이 내 안에 쌓였다. 그리고 평생 가깝게 지내고 싶은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다.
내가 만족한다고 해서 지금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퇴사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유학을 권하고 싶진 않다. 꼭 외국이 아니어도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고, 좋은 사람도 만날 수 있다. 단지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이 길을 선택했고 사회적 시선에 상관없이 나답게 일상을 살 수 있는 현재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부족하지만 나의 이 첫 책을 통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나답게 사는 법을 고민하는 기회가 됐으면 싶다. 내 책이 누군가의 배부른 소리가 아니라 평범한 직장인이 작은 꿈을 품고 살다가 한번 그 꿈대로 살아보기로 결심하는 과정으로 읽혔으면 좋겠다. 또,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매일매일 열심히 사는 한국의 모든 직장인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