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에 답 있다>
어느 날 일본 NHK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애니메이션 영화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삶을 다룬 것이었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혼잣말로 “자, 일해야지, 늙은이” 하면서 작업대 의자를 당겨 앉아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평생 동안 손으로 그림을 그려 왔지만 컴퓨터를 이용한 그리기 작업에도 관심이 가지 않을 리 없다.
어느 날 인공지능AI으로 그림 작업을 하는 젊은이들이 찾아와 그들의 창작품을 시연했다. 팔다리가 기괴하게 뒤틀린 생물체가 바닥을 기며 기묘한 동작으로 이동하는 영상이었다. 어떻게 저런 움직임을 만들어 냈을까 신기한 면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작품을 감상한 후 거장은 이렇게 소감을 말했다.
“나는 매일 아침 이웃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몸이 불편하여 나와 하이파이브 하는 것조차 힘들어 하지요. 그 사람을 생각하면 나는 이 작품에서 어떤 즐거움도 느낄 수 없습니다.”
회의는 침묵 속에 끝났다. 그렇다. 많은 이들이 즐거워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 언어도 그렇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들 가운데는 누군가에게는 아픔을 주는 말이 있다. 전통적으로 써온 ‘살색’이라는 말조차 피부색이 다른 누군가에는 차별로 느껴질 수 있다. ‘미혼모’라는 말만 쓰는 것도 그 당사자만 일방적으로 내모는 사회적 차별의 시각이 담겨 있다. 그래서 ‘살색’을 ‘연주황’으로 바꾸고 ‘미혼부’라는 말도 공식적으로 만들어 쓴다.
이와 같이 차별적인 말 대신 쓰는 공정한 말을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라고 한다. 이러한 언어를 통해 세상을 보면 생각보다 더 따뜻해 보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