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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평온한 척하면 평온해진다.

<평온의 기술>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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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슬프기 때문에 울고, 무섭기 때문에 떤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상식에 대해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울기 때문에 슬프고, 떨기 때문에 무섭다”고 하는 것이 합리적인 설명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감정은 순전히 몸에서 기원하는 본능적인 것이지 정신에서 기원하는 인지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게 바로 제임스가 1884년에 발표한 ‘감정 이론(theory of emotion)’의 핵심 내용이다.

제임스는 이 이론의 연장선상에서 ‘그런 척하기 원칙(As If principle)’이라는 걸 제시했다. “어떤 성격을 원한다면 이미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해 감정이 행동을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행동이 감정을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공학 전도사들은 제임스의 이론을 “꿈꾼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식의 극단으로까지 끌고 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이들이 과장은 저질렀을망정 사기를 친 건 아니다. 제임스의 이론을 이어받은 대릴 벰(Daryl Bem)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행동이 감정뿐만 아니라 믿음까지도 바꾼다는 ‘자기지각 이론(self-perception theory)’을 제시했다.


우리 인간은 타인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을 규정짓는 것처럼 자신의 행동을 보고 자신을 규정하는데, 이게 바로 ‘자기지각’이다. 자기지각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많은 태도가 자신의 행동과 행동이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우리의 지각들에 근거한 것이다. 특별한 생각이나 계획 없이 어떤 행위를 한다면 행위자는 그 행위를 바탕으로 자신의 내적 특성을 추리해낸다는 것이다.

평온 역시 다를 게 없다. 다시 윌리엄 제임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나는 행복해서 노래하는 게 아니다. 노래를 불러서 행복한 것이다”. 이후 여러 연구자가 평온한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분노의 감정을 신속하게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입증해 보였다. 평온한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실제로 평온함을 느낄 수 있으며, 평온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실제로 평온한 감정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C. S. 루이스(C. S. Lewis, 1898~1963)는 우리가 파티에 가서 좋은 인상을 남기겠다고 의식적으로 애쓰면 오히려 성공하지 못할 확률이 높을 거라고 했다. 우리는 운동선수들에게서 이런 증언을 수없이 많이 듣는다. 매우 중요한 시합이기 때문에 잘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오히려 평정심을 잃게 해 좋지 않은 결과를 낳더라는 증언 말이다.

이는 ‘아닌 척하기 원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원칙에 따르자면, 평온 따위는 아예 잊고 살아야 오히려 평온해질 수 있다는 주장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아닌 척하기’와 ‘그런 척하기’가 꼭 상충하는 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선 ‘아닌 척하기’가 더 나을 수 있지만, 평범한 일상에선 ‘그런 척하기’가 도움이 된다.

우리는 감정이 행동을 만든다는 법칙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다. 이 믿음을 고수하는 한 평온은 영영 기대하기 어렵다. 생각해보라. 먹고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데 평온한 마음이나 감정을 가질 기회가 오겠는가 말이다. 평온한 척함으로써 평온해지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 게 좋겠다.

평온한 척하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건 단연 ‘자연’이다. 사실 이건 이미 모든 사람이 알고 있거니와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골치 아픈 일이 많을 때 훌훌 털고 대자연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갖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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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면서 마음이 평온해지는 효과에 대해 심리학자들은 오랫동안 연구해왔는데, 그런 효과를 가리켜 ‘황무지 효과(wilderness effect)’라고 한다. 미국에서 수년 동안 시행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82퍼센트가 ‘자연의 아름다움에 깊이 감동한 적’이 있으며, 45퍼센트가 자연 속에서 ‘심오한 영적 체험’을 했다고 답변했다. 왜 그럴까?

우리 인간은 자신이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통제력 착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실제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게 너무 많다는 걸 깨닫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고, 심지어 절망까지 하게 된다. 자연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우리는 현실 감각을 잃기 쉬운데, 바로 대자연이 우리에게 이 현실 감각을 돌려준다.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상황에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왜소하고 무기력한 존재인지 확실하게 깨달으면서 오히려 평온을 누리게 된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일시적이라도 평온을 원한다면 대자연과 접할 수 있는 여행을 떠나는 게 가장 좋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돈과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사람이 손쉽게 대용품으로 할 수 있는 건 텔레비전의 자연 다큐 프로그램 시청이다. 자연 다큐를 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왜소함을 느끼면서 겸허해지는 마음과 더불어 평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자연 다큐는 노인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게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일상에서 가장 쉽게 평온한 척할 수 있는 행동은 등산이다. 등산이 힘들거나 시간이 없어서 곤란하다면 산책을 하면 된다. 산책을 즐긴다고 해서 ‘겉멋’이라거나 ‘허세’라고 볼 사람도 없으니 그 얼마나 좋은가. 요즘 미세먼지가 산책을 방해하는 복병으로 등장했는데,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그래도 굴하지 말고 미세먼지가 없거나 약한 날을 택해 마스크로 중무장을 하고서라도 산책에 나서보자.

평온에 반대하고 성공에 집착하는 사람도 산책을 이용할 수 있다. 어느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조언을 읽다가 웃음을 터뜨리긴 했지만, 꽤 그럴듯해 보인다. “고급 주택가를 산책한다. 큰 저택이나 고급 승용차를 바라보고 그 호화로운 분위기를 맛보며 내일은 나도 이 일원이 된다고 마음속에 그린다.” 당신이 이 말을 듣고 웃었다면, 당신은 평온에 친화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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