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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너답게 않게 왜 그러니?”

<평온의 기술>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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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쓱하게 흘린 미소 힘없이 쳐진 두 어깨
금방이라도 울 듯한 너의 모습을 봤어
너답지 않게 왜 그러니 나 같은 애도 잘사는데
처음부터 전부 잘되면 재미없어
자 내 손잡고
눈물 콧물 짰던 길었던 밤은 잊고 이젠 웃어.

소녀시대의 〈비타민〉이란 노래의 가사다. 친구를 위로해주기 위해 하는 “너답지 않게 왜 그러니?”는 아름답다. 그러나 이 말이 이런 좋은 용도로만 쓰이는 건 아니다. 예컨대, 화를 낼만 한 일에 화를 낸 사람에게 친구가 “너답지 않게 왜 그러니?”라고 한다면, 이렇게 되받고 싶지 않을까?

“나다운 게 뭔데?”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대화의 한 토막이다.

“그냥 너답게 행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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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우리가 즐겨 쓰는 말 중의 하나다. 그런데 과연 ‘너답게’ 또는 ‘나답게’의 실체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답이 영 나오지 않는다. ‘나’는 늘 변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매일 바뀌는 건 아니지만, 오랜 기간을 두고 보면 ‘고정된 나’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다.

나는 글쟁이로서 가끔 우연한 기회에 독자들을 만나는데, 좀 당황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다. 나의 글쟁이 역사가 30년쯤 되는데, 그간 나는 몇 차례 변화를 겪었다. 그런데 일부 독자들은 옛날의 나만을 기억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인사를 건네니 나로선 할 말이 없어진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닌데도, 잠시나마 어제의 나로 행세해야 한다는 건 당황스러운 일이다.

누구든 한 번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시인 T. S. 엘리엇(T. S. Eliot, 1888~1965)은 「칵테일 파티」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던 건지도 모른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안다는 건
우리가 그들을 알았던
순간의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네
그들은 그때 이후로 변했고
우리는 그들을 만날 때마다
전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거라네.

이렇듯 현실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데도 과거 경험의 포로가 되어 현실을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평가하는 오류를 가리켜 ‘정적 평가의 오류(fallacy of static evaluation)’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왜 오류냐고 반문한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평소 일관성을 높게 평가하는 문화적 세례를 받고 자라왔기 때문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일관성이 없는 사람은 우리를 짜증나게 만든다. 아니 도무지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마저 갖게 한다. 우리가 정치인들을 비판할 때에 가장 많이 문제 삼는 것도 바로 일관성 결여다. 뚜렷한 원칙이나 소신이 없이 상황이나 입장에 따라 자신의 예전 주장을 뒤집고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따라 정반대로 말하는 정치인을 보면 역겹기까지 하다. 그런데 일상적 삶에서 아는 사람이 그런 행태를 보인다면, 어찌 그 사람을 좋게 볼 수 있겠는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누군가를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했을 땐 그 사람의 좋은 점이 그 어떤 상황 변화에도 휩쓸리지 않고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칭찬하는 말이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야 할 이런 일관성은 ‘정적 평가의 오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인데도 우리는 의외로 그런 구분을 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정치와 관련해서도 누군가를 한 번 지지했으면 끝까지 지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지지하는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거니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렇지 않다면,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지지를 기본 행동강령으로 삼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른바 ‘빠’라는 말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남녀 사이에서야 누군가를 한 번 좋아하면 끝까지 좋아하는 것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정치인이나 유명 인사를 한 번 좋아하면 끝까지 좋아하고 그 사람의 일부가 아닌 모든 것을 좋아한다는 건 좀 징그러운 일이다.

그런 일관성을 ‘막무가내 일관성’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 다음 명언들은 바로 그런 유형의 일관성에 대한 평가로 볼 수 있겠다.

“어리석은 일관성은 편협한 마음의 유령이다.”(랠프 월도 에머슨)
“일관성은 상상력이 없는 사람의 마지막 도피처다.”(오스카 와일드)
“사람들이 유일하게 진정으로 일관적일 때는 죽은 것이다.”(올더스 헉슬리)

‘막무가내 일관성’을 선호하는 경향은 나이가 들수록 더 짙어지는 경향이 있다. 비일관성은 정서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케팅 전문가들은 나이 든 사람을 대상으로 세일즈를 할 땐 새로운 제품이 어떤 식으로 기존의 가치와 부합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그 어떤 정서적 혼란이 일어나더라도 ‘정적 평가의 오류’는 범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런데 이 오류는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도 범할 수 있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이런 오류를 극복하는 것을 자기계발의 주요 소재로 삼았는데, 그게 바로 ‘마인드세트(mindset)’라는 개념이다. 마인드세트는 삶을 대하는 사고방식, 생각의 틀, 심적 경향을 말한다.

캐럴 드웩(Carol Dweck)은 ‘고착형 마인드세트’와 ‘성장형 마인드세트’라는 두 가지 유형의 마인드세트를 제시한다. 고착형 마인드세트는 자신의 자질이 돌에 새긴 듯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는 마음, 성장형 마인드세트는 자질은 노력만 하면 언제든지 향상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 마음이다. 드웩은 자질이 고정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인간을 스트레스・불안과 같은 고통에 시달리게 하는 결정적 원인이라는 사실을 연구를 통해 입증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이야기다. 아이들에게 간단한 문제를 풀게 한 뒤, “오, 넌 정말 똑똑한 아이로구나”라고 칭찬을 하면 고착형 마인드세트를 강화하고, “정말 잘했다. 열심히 노력했구나”라고 칭찬을 하면 성장형 마인드세트를 강화한다는 이야기다. 즉, 성공이란 선천적인 재능이 아닌 ‘근성과 수고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성장형 마인드세트다.

많은 학자가 드웩의 연구 결과를 확장시켜 나갔다. 헤이즐 로즈 마커스(Hazel Rose Markus)는 성장형 마인드세트와 고착형 마인드세트는 단 며칠간의 연습만으로도 우리 마음속에 집어넣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러분의 배우자와 자녀, 동료가 스스로 변하지 않는 기질에 갇혀 살도록 만들고 싶은가? 그렇다면 칭찬은 그들을 ‘특별하게’보이게 하는 재능에 대해 하고, 실패의 원인은 그들의 내면적인 단점에서 찾아 나무라자. 그리고 여러분의 기대 수위를 최대한 낮춰서 그들의 위태로운 자신감을 지켜주자. 반대로 여러분의 배우자와 자녀, 동료가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돕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들의 노력을 칭찬하고, 실패의 원인을 함께 밝혀내고, 더 높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동기를 부여하자.”

이런 마인드세트 연구 결과가 타당하다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라는, 즉 “그냥 너답게 행동하라”는 조언은 사실상 무익하다. 올리버 버크먼(Oliver Burkeman)은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우리는 나다운 것, 즉 우리의 모습에 대해 ‘실제로’ 알지 못한다. 둘째, 혹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 하더라도, 그 내면의 상태를 그대로 행동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면 상태를 행동으로 보여주려는 노력 자체가 인위적일 수 있으므로 그것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성장형 마인드세트’를 계발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꼭 성장해야만 하는가?”라거나 “냅둬, 나 그냥 이대로 살래!”라는 반론이 가능하겠지만, 성장을 꼭 세속적인 자기계발로만 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우리의 분명한 단점마저 고치지 않으려는 이유는 대개 “바로 그게 나야!”라는 식으로 자기 정당화를 하기 때문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그런 정도의 변화와 성장마저 두려워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사실 “너답지 않게 왜 그러니?”의 반대편에 “난 원래 그래!”가 있다. 아주 못된 성격이나 버릇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걸 지적해주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내놓는 최고의 핑계가 바로 “난 원래 그래!”다. “천성을 바꿀 수는 없잖아. 어쩔 수가 없어!”라는 후렴구도 빠트리지 않는다. “냅둬. 나 이렇게 살다가 죽을래”라고 말하는 사람마저 있다. “그래 그렇게 살다가 죽으렴”이라고 축하해주어야 하나? 그런 사람에게 “너답지 않게 왜 그러니?”라고 말해줄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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