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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18. 2018

02. 나는 이미 반란을 꿈꿔 왔다.

<나에게 불황은 없다>




사실 내 인생은 처음부터 고난과 반전의 연속이었다. 어릴 적 우리 집은 무척 가난했다. 내 고향인 경북 영주 풍기읍은 인삼과 사과로 유명한 고장이자 직물공장이 많았는데, 지금도 풍기 인견(人絹)으로 무척 유명한 곳이다. 인삼밭이나 과수원이 없는 집 자녀들은 대부분 원단 짜는 공장을 다녔다. 나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매일 비어 가는 쌀독을 걱정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에 중학교를 졸업한 뒤 나는 곧바로 원단을 짜는 직물 공장에 다녔다. 내가 다니던 공장은 하루 열두 시간을 일주일씩 주간 야간을 반복하며 근무했다. 일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배가 고파도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공장에는 변변하게 식사할 만한 곳도 없었고, 교대로 식사를 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기계를 돌려놓고 구석진 곳에 박스를 깔고 앉아 각자 싸온 도시락을 먹었다. 가끔 야간 근무를 할 때면 야식으로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다. 하지만 기계가 멈추면 안 되기 때문에 원단 사고가 나면 일단 기계부터 살피느라 퉁퉁 불은 라면으로 허기를 때우기 일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구질구질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정작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다른 데 있었다. 야간조일 때 밤새 열두 시간 일을 하면 다음날 아침 7시에 교대가 이루어진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졸린 눈을 비비며 공장 대문을 나설 때면 아이들이 등교하는 시간과 맞물렸다. 고등학교는 공장 앞을 지나야 갈 수 있었다. 말하자면 나의 퇴근 시간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창들이 등교를 하는 시간과 맞물려 마주치는 경우가 많았다. 난 친구들과 마주친 아침이면 몸보다 마음이 참 힘들었다. 그래서 그 무렵, 나는 나만이 즐길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것은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 일이었다. 
  
나는 야근 근무가 끝나고 돌아와서 세 시간 정도 잠을 자고 집을 나서곤 했다. 이대로 공장에 다니며 일만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일 외에 즐길 수 있는 나만의 취미를 찾고 싶기도 했다. 이왕이면 머릿속을 풍부하게 채워 줄 수 있었으면, 텅 빈 가슴을 메워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고민하다 찾은 곳이 바로 도서관이었다. 열두 시간 밤샘 근무 후 다음날 아침에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녹초가 되기 마련이다. 정신없이 세 시간 정도 눈을 붙인 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 몇 시간 못 자고 일어나는 게 힘들었지만 도서관에 간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일어나졌다. 그렇게 야간 근무를 하는 주는 거의 매일 도서관을 다녔다.



도서관 가는 길은 유일하게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아스팔트길을 걸으며 참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 좋았다. 걷다 보면 눈이 시리도록 고운 햇살이 친구가 되어 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사색가가 되어서 나의 미래를 함께 설계했다. 비록 지금은 시커먼 기름때가 묻은 몸뻬 바지를 입고 다니지만, 언젠가 친구들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업을 갖고 돈을 벌어서 잘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지금은 가느다란 빛이 비치는 좁고 어두운 동굴에 갇혀 있을지라도 언젠가는 탁 트인 들판에 나가 마음껏 햇빛을 맞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런 희망과 믿음을 자라게 해 준 곳이 바로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모든 책이 나의 공략 대상이었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고등학교를 가지 못한 설움을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위안을 삼았다. 
  
풍기서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나가면 영주시가 나왔다. 그 당시 내 두 발로 갈 수 있는 가장 넓은 세상이었다. 그곳에서 ‘소백 풍물’이라는 풍물 동아리도 들었다. 낮에 일을 마칠 때면 밤에 하는 동아리에서 장구와 북을 배웠다. 한바탕 크게 소리치고 나면 가슴에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배움에 대한 갈증이 사라지지 않은 탓이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공장에 다니던 나는 일하면서 학교도 다닐 수 있는 제도를 찾아냈다. 2주에 한 번씩 일요일마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집에서는 방송을 청취하는 식으로 3년을 공부하면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장 안동에 있는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지원했다. 
  
안동까지 왕복 세 시간을 버스 타고 다녀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가끔 36시간 잠을 못 자고 야근을 할 때도 있었다. 몇 번은 방직 기계 앞에서 깜박 졸다가 기계와 부딪혀서 손을 다칠 뻔한 아찔했던 순간도 있었다. 움직이는 베틀에 잘못하다 손이 끼이면 손가락이나 손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일을 하면서 공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포기한다는 것은 나를 더욱 좌절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내 속에서 꿈틀거리는 배움의 갈증을 채우기 위해, 더 나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며 그 시간을 견뎌 냈다. 그렇게 3년을 공부해 나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고서도 무언가를 배우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열등감에서 오는 갈증이었다. 그래서 더욱 시간을 쪼개서 쓰기로 결심했다. 야근하고 돌아오는 날, 도서관에 가는 대신 주산학원을 다니기로 한 것이다. 내가 학원을 가는 시간은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학교를 마치고 오는 시간이라 함께 수업을 받아야 했다. 선생님은 우려 섞인 눈빛으로 괜찮겠냐고 몇 번을 물었지만 나는 흔쾌히 같은 반에서 배워도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주산학원과 컴퓨터학원, 피아노학원을 다니며 배움에 대한 갈증을 채웠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뎌 냈는지 아찔하기만 하다. 내가 소녀였던 시절, 고향의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에서 헬렌 켈러는 이런 말을 했다.

“쉽고 편한 환경에선 강한 인간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련과 고통의 경험을 통해서만 강한 영혼이 탄생하고, 통찰력이 생기고 일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며, 마침내 성공할 수 있다.” 
  
나는 그 구절을 되새기며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눈물을 흘렸다. 노을이 깊어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 말이 나의 삶에 꼭 맞는 말 같아서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때부터 내가 감당하기 힘든 시련조차도 누구의 탓을 하거나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미련스러울 정도로 그 시간을 참고 견디며 끝까지 결과를 내려고 노력했다. 내 노력이 헛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고단하고 힘든 상황에서 울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또 읽으며 행복한 생각을 했고, 스스로를 동기부여하며 또 한 번 달릴 수 있는 힘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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