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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18. 2018

06. 믿음은 배반당하게 되어 있다.

<말기술>




회사를 망하게 하는 말, “믿어보자”


믿음은 배반당하게 되어 있다.

수년 전 나는 30인 규모의 회사를 이끄는 한 CEO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나의 클라이언트일 뿐만 아니라 친구이기도 했기에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톤으로 짐작하건대 본인의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거나 가족 중 누군가 세상을 떠난 게 아닐까 싶었다. 

“스티븐, 괜찮나?” 
“아니.”
“누가 다치기라도 했어?” 

나의 물음에 스티븐은 누가 다치거나 아픈 건 아니라고 했다. 이야기인즉슨, 그가 이끄는 회사의 사주가 직원들의 신용카드 사용내역을 검토하다가 알 수 없는 지출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몇 주에 걸쳐 어렵게 조사한 결과, 그 회사에서 10년 넘게 일한 경리직원이 회삿돈을 훔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기 행각은 여러 종류의 고생과 뼈아픈 결과를 낳았다. 회사는 더 이상의 절도를 막기 위해 그 즉시 돈을 들여 시설 보안과 전자 보안을 강화했다. 또 횡령 총액을 확인하기 위해 대대적인 회계 감사를 의뢰해야 했다. 이 일에 연루된 다른 사람이 없는지 확인해야 했고, 재정 업무 전체에 관한 새로운 정책과 절차를 수립해야 했다. 

이 일이 직원들의 사기와 인간관계에 미친 영향은 경제적 비용 이상이었다. 내 친구는 여러 번 껄끄러운 자리에 참석해야 했다. 처음에는 변호사와 경영진을 만나야 했고, 다음에는 문제의 경리 직원을 만나야 했고, 마지막에는 회사의 전 직원을 만나야 했다. 규모가 크지 않았기에 더더욱 관계가 두텁고 동료를 가족처럼 생각하는 회사였다. 많은 이들이 배신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스티븐은 경리직원을 잘 알았기 때문에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왜 자기가 이 사태를 미리 파악하지 못했는지, 횡령 이 가능해지기 전에 그런 상황을 예방해야 했건만 왜 그러지 못했는지를 두고 자책했다. “내가 앞으로 다시 직원들을 신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는 말까지 했다. 

내 친구의 경우는 그나마 운이 좋았다. 경제적 손실이 천만 원대에 서 끝났고 사기를 친 것도 직원 한 사람에 그쳤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직원이 더 가담했거나 경리의 행동이 회사의 클라이언트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더라면 사태가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다. 이 사건을 겪은 후 스티븐은 고객들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회사 직원이 당신 돈을 훔쳤다”라고 설명해야 하는 상황을 상상하고 몸서리를 쳤다. 


    

믿음을 다시 정의하라.

나는 선천적으로 사람을 잘 믿는 성격이다. 그저 사람을 쉽게 믿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을 신뢰하고자 하는 깊은 열망을 느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바르고 정직하게 행동하리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삶은 나에게 사람을 늘 믿을 수는 없음을 가르쳤다. 그게 인생이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노래했듯이 “참 웃긴 소리지만,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꿈을 짓밟길 좋아한다.” 나는 인간 본성을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믿음이란 좋은 의도를 가진 정직한 사람을 만나는 것 이상의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신뢰의 속도(The Speed of Trust)』에서 스티븐 M. 코비는 사람에 대한 믿음을 두 종류로 구분했다. 하나는 인격에 대한 믿음이고, 하나는 능력에 대한 믿음이다. 이 구분이 유용한 이유는 모든 배신이 도덕 문제나 인격 문제와 연관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경리직원 사건을 생각해보자. 그 사건이 횡령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그 직원이 정직하긴 하지만 무능력한 탓에 장부를 엉망으로 만든 것이 발견되었더라면? 그 역시 사소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횡령에 관련된 배신이나 후회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는, 모임 기획자가 실수로가 아니라 당신의 커리어를 방해하려고 일부러 중요한 인물을 배제했다고 상상해보자. 그런 사악한 의도가 있었다면 그의 행동이 10배는 더 나빠진다. 

이렇게 다른 상황을 가정해보면 인격과 능력을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둘을 구분하지 않으면 믿음이 지나치게 윤리적인 사안이 되고, 그러면 우리가 믿음에 대해 제기하는 모든 질문은 그 사람의 훌륭함이나 도덕성을 의심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기준이 이렇게 민감해지면 우리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덜 하게 되고 너무 많은 것을 추측으로 남겨 두게 된다. 
  

믿음은 이진법이 아니다.

우리는 믿음에 대해 말할 때 큰 단위를 쓰는 경향이 있다. 즉 “그는 눈 딱 감고 믿어도 되는 사람이다”라든가 “난 그 사람을 절대적으로 신뢰해”라든가 “나는 널 목숨 걸고 믿어” 같은 표현을 자주 쓴다. 부정적인 표현도 “다시는 그들을 믿지 않겠다”라든가 “그가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난 안 믿어”라든가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어”라는 식이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말은 신뢰가 ‘0 아니면 1’이라는 양자택일의 관념을 강요한다. 평생 모든 일에 있어서 신뢰를 받든가, 아니면 어떠한 신뢰도 받지 못하든가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감정을 가질 때도 있다. 특히 믿음을 배신당하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감내해야 할 때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믿음은 훨씬 더 미묘하게 작용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믿을 때 당연히 상황을 적용한다. 이를테면, 나는 집 근처 레스토랑의 셰프가 언제 가든지 맛있는 그리스식 샐러드를 만들어주리라고 믿지만, 그에게 우리 집 갓난아이를 한나절 봐달라고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재정 면에서나 삶 전반에서 나의 아버지를 믿지만, 그에게 내 옷을 골라 달라고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교회 목사님이 육아에 관해서 유익한 지혜를 나눠주신다고 믿지만, 그에게 내 맹장을 떼달라고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무리한 예시는 여기까지만 들겠다.) 

핵심은 맥락과 상황이다. 우리는 믿음에 구체적인 조건을 달아야만 한다. 누가, 무슨 상황에서, 무슨 일을 하리라고 믿는지, 또 그 믿음 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누군가를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말이나 절대 믿어선 안 된다는 말은 틀린데다가 때로 너무도 비싼 대가를 요구한다. 나아가 우리가 실제로 맺는 거의 모든 인간관계에는 믿음과 불신이 다양한 정도로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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