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세상이 나를 주목하게 하라.

<제갈량처럼 앞서가라>

by 더굿북

유비가 신야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갈량의 친구 서서는 신야로 가서 유비를 만났다. 유비가 이름없는 자신을 선비로 깍듯이 대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서서는 제갈량을 추천했다.

“제갈공명은 누워있는 용이라 불립니다. 장군께서는 그를 만나보지 않겠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그럼 한번 같이 모시고 오시면 어떻겠소.”
서서가 말했다.
“그는 가서 볼 수는 있으나 데려올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한번 왕림해 보셔야만 합니다.”
유비는 현자를 구하려는 절박한 마음에 마침내 제갈량을 찾아갔다.
‘세 번이나 찾아가서야 비로소 만났다.’
_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20160804%C1%A6%B0%A5%B7%AE.jpg?type=w1200 『三国志(Three Kingdoms)』 의 제갈량


융중은 아름다운 시골의 촌마을로 높지는 않지만 수려한 산들로 둘러싸인 조용한 곳이다. 숲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무성하고, 물은 깊지 않으나 깨끗하고, 새들이 지저귀며 꽃들이 만발한 땅이다. 융중산은 해발 300m 정도 된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기 위해 제갈량이 사는 융중의 초가집으로 세 번이나 찾아갔다. 제갈량은 유비가 보여준 ‘삼고초려의 정성’에 감동해 마침내 융중을 나와 유비의 책사가 되었다. 서서가 조조 진영으로 가고, 방통이 유비 진영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거의 유일한 책사로 활약했다. 방통은 익주를 공략하러 가는 도중 날아오는 화살을 맞고 비명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후 제갈량은 죽을 때까지 유비의 유일한 책사로 활약했고, 유비 사후에는 사실상 황제의 권한을 대행하는 막강한 실권자로 나라를 지배했다. 그 시작이 바로 유비의 ‘삼고초려’였던 것이다.

주목할 점은 당시 서서가 유비에게 ‘장군이 의당 몸을 굽혀 찾아가라.’고 권하며 천하의 인재인 제갈량의 수준에 부응하는 예우를 갖추라고 주문한 사실이다. 늘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유한 제갈량의 기개와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 일거에 재상이 되다.

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 벼슬을 하지 못한 문사(布衣之士)가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만나 일거에 재상으로 발탁되는 일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나라의 운명이 뛰어난 인문교양을 지닌 이들 문사의 지략에 좌우된 탓이다. 수많은 문사가 계책을 꾸미는 책사(策士)와 모의를 전담하는 모사(謀士) 및 유세에 뛰어난 세사(說士) 등으로 활약한 배경이다. 전국시대는 바로 이들 사인(士人)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난세가 도래할 때마다 온갖 지략을 갖춘 사인들이 활약했다. 제갈량도 같은 유형이다.

당초 유비가 양양의 유명 인사인 사마휘를 만나 현자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사마휘는 복룡(伏龍)과 봉추(鳳雛)를 언급했다. 복룡은 제갈량, 봉추는 방통을 말한다. 엎드릴 복(伏)과 누울 와(臥)는 뜻이 거의 같다. 제갈량이 양양의 융중에 자리를 잡은 것은 후한 말기 양양이 거의 전란을 입지 않은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양양은 당시 물산이 풍부하고 문화가 번성했던 곳이다. 제갈량을 비롯해 방덕공과 그의 아들인 방산민과 조카인 방통, 의성(宜城)의 마량과 마속 형제, 박릉의 최주평, 영주의 서서와 석도, 여남의 맹건 등이 모두 형주에 모여 있던 명사들이다.

양양 일대는 지방의 유력자들도 모여 살았다. 그곳에는 방(龐), 황(黃), 괴(蒯), 채(蔡), 마(馬), 습(習)씨 등의 6대 호족이 존재했다. 후한의 중후기 이후 지방은 거의 이들 호족 세력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이들의 지지와 인정이 없다면 그 땅에 발판을 쌓는 것이 어려웠다. 유표가 형주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도 채씨와 방씨 세력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제갈량도 이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형주 내의 유력 호족세력 내에서 덕망 있는 인물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제갈량이 천하의 추녀로 알려진 황승언의 딸을 부인으로 맞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황승언의 딸은 사서에 그 이름이 자세히 나오지 않고 있으나 세인들은 흔히 추녀 아추(阿醜)라는 뜻에서 통칭 ‘황아추(黃阿醜)’로 불렀다. 천하의 현자 제갈량이 ‘황아추’와 결혼하게 된 배경과 관련해 「제갈량전」의 배송지 주에 인용된 『양양기(襄陽記)』는 이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ghkddkwncn.jpg?type=w1200 여성의 이름이 특별히 없던 당시 황씨 부인은 못생겼다는 뜻으로 아추라고 불 리다가 후대 사람들로부터 황월영(黄月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사진은 황씨 부인을 기리는 월영전



“형주의 명사 황승언이 어느 날 제갈량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처를 맞이하려 한다고 들었는데 나에게는 딸이 하나 있네. 못생기고 붉은 머리카락에 피부는 검지만 재지(才智)의 측면에서는 자네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지 모르겠네.’라고 했다. 제갈량은 뜻밖의 제안에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당시 양양사람들은 모두 제갈량의 이런 행동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쓸데없이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명의 처 선택을 흉내 내는 법이 아니다. 그랬다가는 황승언의 딸과 같은 추녀를 마누라로 삼게 된다.’며 비웃었다.”

삼국시대에도 제갈량과 같은 인재는 뛰어난 미모와 재주를 자랑하는 가인(佳人)과 결합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이는 수천 년을 이어온 전통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제갈량은 왜 추녀로 유명한 ‘황아추’를 아내로 맞이한 것일까? 나관중 역시 『삼국연의』에서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신비스런 인물로 묘사한 제갈량이 ‘황아추’와 결혼하게 된 배경을 놓고 적잖이 곤혹스러워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천하의 인재 제갈량은 무슨 이유로 ‘황아추’와 결혼한 것일까?

송대의 주희(朱熹)는 제갈량이 추녀를 처로 삼았기 때문에 미색에 빠지는 일이 없이 욕심을 적게 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지혜가 날로 밝아지고 위엄과 명망이 높아지게 되었다는 특이한 해석을 내렸다. 마치 서양에서 소크라테스가 악처 크산티페를 만난 덕분에 위대한 철학자가 될 수 있었다는 식의 주장과 다름없다. 크산티페는 결코 악처가 아니고, 후대의 호사가들이 소크라테스를 높이기 위해 그 부인을 악처로 만들었다 해도 주희의 이런 해석도 기본취지는 같다. 결과론적인 해석일 뿐 제갈량이 황아추와 결혼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상과 사람을 보는 통찰력이 뛰어나기 이를 데 없는 제갈량은 왜 황아추를 선택한 것인가?


전략적 선택으로 추녀 황아추를 배우자로 들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아무런 배경도 없는 시골의 가난한 젊은 선비 제갈량이 융중에서 밭을 갈고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큰 재주가 있을지라도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수 없었다. 자신의 재능을 믿었고 그 지방 명사에게 좋은 평가는 받고는 있어도 그들과의 연결고리가 그다지 확고한 것도 아니었다. 혼인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가장 간편하면서도 빠른 방법이었다.

실제로 황아추의 아버지 황승언은 한수 이남인 면남(沔南)의 명사이고 형주목인 유표와 형주 최대의 호족인 채씨 문중과도 가까운 친척이었다. 결혼을 통해 이런 사람과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제갈량에게는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황승언의 사위가 되자 바로 형주의 세력가와 명사로부터 존중받게 되었고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유비가 형주에 와서 인재를 모았을 때 그 지방의 명사가 즉석에서 제갈량을 천거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제갈량의 누이 역시 명문가와 결혼한 사실을 보면 이런 추론이 더욱 설득력을 지닌다. 그의 큰 누이는 양양의 명사 괴기와 결혼했고, 둘째 누이는 방씨 가문의 방산민에게 시집을 갔다. 당시 방씨 가문의 좌장인 방덕공은 양양의 호족 중에서도 우두머리격인 인물이다. 방덕공은 교류범위도 넓은 데다 식견 또한 높았다. 유표가 몇 번이나 그를 맞이하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거절당한 게 그렇다. 당시 방덕공의 주변에는 재간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서로 교류하고 시국을 논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방덕공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 당시 그의 인물 품평은 사대부들 사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은 한수 이남의 명사

또 사서의 기록을 보면 방통의 동생 방림(龐林)은 습정(習禎)의 여동생을 처로 맞이했기 때문에 습씨와 인척 관계에 있던 마량과 마속 형제는 편지에서 제갈량을 존형(尊兄)이라고 부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은 유표의 처남인 채모의 매부였기 때문에 채모는 제갈량에게 처 외숙이 된다.

제갈량은 결국 황아추와 결혼함으로써 한꺼번에 이들 양양의 6대 호족과 인척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당시 제갈량은 양양의 최고 인물인 방덕공을 끊임없이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그는 늘 겸허한 태도를 보여 항상 홀로 마루 밑에서 절하고 가르침을 받을 때는 반드시 무릎을 꿇었다. 방덕공은 항상 그에게 서책을 빌려주며 지도했다. 방덕공이 그를 ‘복룡’이라고 칭한 근본배경이다. 당대에 제갈량이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방덕공의 지우(知遇)에 그 원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이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배경을 따지고 올라가면 황씨 부인과 결혼해 방덕공을 만난 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제갈량은 ‘황아추와의 결혼’이라는 전략적 선택을 통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강력하게 알리게 되었고, 결국 유비와 함께 세상을 평정하려는 ‘목표지점’에 순조롭게 다가갔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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