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를 위한 인문학 교육법>
인문학 강의를 하다 보면, 특히 인문학 교육에 관해 이야기하면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작가님, 다 좋은데요. 인문학 교육하다가 우리 아이가 대학 못 가고 가난하게 살면 어떻게 해요?”
질문자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져 온 우리의 교육시스템으로는 인문학 교육은 무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과 같은 입시제도 아래에서 인문학 교육을 한다는 것은 대학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이해할 수 있다. 인문학이 취직이 안 되는 대표적인 전공으로 낙인 찍혀 있는 사회적 풍토에서 인문학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부(富)’와 멀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다 맞는 말은 아니다.
인문학을 하면 가난해진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사회에서 노예를 두고 살았다. 당시 공자의 지위는 요즘으로 치면 하버드대 총장 정도였다. 맹자에게는 28년 동안 7,000명을 먹일 수 있는 금이 있었다. 고대로부터 인문학을 한 사람들은 모두 부자였다. 물론 예외는 있다. 장자 같은 철학자는 가난하게 살았는데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다. 부자로 살 수 있었지만 그런 삶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왕과 귀족들이 찾아와 지혜를 구했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기업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미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교차점에서 탄생한 것이 애플”이라고 고백했고, 삼성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경영진이 TV 혁명을 일으켰다. 모기룡이 쓴 『왜 일류의 기업들은 인문학에 주목하는가』에 보면 삼성이 TV를 개발할 때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접근해 성공한 사례가 나온다.
2000년대 중반, 텔레비전 시장이 한창 과열되어 있을 때, 삼성의 고위 경영진들은 ‘왜 우리 제품이 인정받지 못하는가’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당시 삼성의 텔레비전은 경쟁사들의 제품과 비교해 기술력이나 외관이 비슷한 수준이었고, 기술 개발자들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기술을 시장에 선보일까만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무차별적인 기술 퍼레이드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고 더 좋은 기능에 대한 필요성도 크게 절감하지 못했다. 삼성의 경영진들은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들은 ‘텔레비전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팔까?’에서 ‘가정에서 텔레비전이란 무엇일까?’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삼성에서는 인문과학 분야의 전문가들을 팀으로 구성하여, 소비자를 관찰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거실에 두고, 이를 구매하는 주체는 여성이며, 여성들은 텔레비전의 외관에 불만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 이에 경영진들은 가구 디자인의 최고라 불리는 북유럽에 가서 직접 장인들에게 강좌를 들었으며, 텔레비전이 주는 기술적 이미지를 최대한 부드럽고 은은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삼성의 기술과 소비자(사람)에 대한 이해가 결합하면서 텔레비전의 새로운 모델이 탄생했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으로 삼성은 5년 뒤 시장점유율을 두 배 이상 증가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인문학이 ‘부’를 창조한다는 것이 맞는 말이지만, 부자가 되기 위해 인문학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인문학 열풍이 처음 시작된 곳은 대기업이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대기업 CEO들은 스티브 잡스처럼 큰돈을 벌고 싶었기 때문에 인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잡스처럼 컴퓨터 산업에 혁명을 일으키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잡스처럼 돈을 벌고 싶어서 인문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아직도 잡스의 인문학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잡스가 말한 과학기술이 뭔지도 잘 모르고 있고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결합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있다. 한마디로 잡스의 본질에는 별 관심이 없고 잡스의 껍질만 열심히 추구하는 인문학, 그것이 우리나라 기업의 인문학인 것이다. 내용을 잘 몰라도 부하 직원들이 만들어준 스티브 잡스식의 PT만 잘하면 경영자에게 인정받는 대기업 체제, 잡스가 말한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결합’이 뭔지 전혀 몰라도 ‘잡스’와 ‘인문학’만 들먹이면 앞서가는 사람으로 대우받는 사회 분위기가 인문학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있다.
본질을 추구하는 인문학을 하면 ‘부’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런데 우리는 본질을 추구하는 인문학을 하고 있지 못하다. 대기업 인사담당자들은 “우리나라 인문학 전공자들은 인문학을 주입식으로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단편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서양의 인문학 전공자들은 창의력이 뛰어난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대기업에서는 ‘컴퓨터 능력과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선호하게 되었다.
세계 최고의 ‘부’는 인문학이 갖고 있다. ‘생각하는 인문학’을 한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앞으로는 인간을 감동하게 하는 제품만 살아남게 된다. 그럴수록 인문학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본질을 추구하며 ‘생각하는 인문학’을 한 사람들은 회사에 들어가 히트작을 낼 것이고, 공무원이 되면 나라를 살리고 국민을 위하는 정책을 마련해 실천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 경제는 더 부강해지고 복지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부모 세대들이 성장한 1980~1990년대는 제품을 많이 파는 사람이 부자가 되었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21세기는 인간과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이 부자가 된다. 환경친화적인 제품을 만들어내는 기업, ‘부’를 잘 분배하는 사람이 존경받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1980~1990년대 관점으로 아이들이 만나는 미래를 판단하고 교육한다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변화된 세상에 적응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한 미래를 내다보고 인문학 교육을 실천한다면 아이들은 제대로 성장해 미래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하고, 부와 명예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인문학이 현재의 ‘부’이자 미래의 ‘부’라고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