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보이는 눈이 아닌 보는 눈을 가져라.

보는 데서 창조성이 시작된다.

by 더굿북

내 작업은 눈에 익숙한 것들을 내가 어떻게 보는지를 ‘보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 재스퍼 존스(Jasper Joh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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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어! 이게 어디로 갔지?” 누군가 분주하게 책상에서 클립을 찾는다. 불과 오 분 전에 분명히 클립을 서랍에서 꺼내 책상 위에 놓아두었는데 찾을 수가 없다. 한참을 찾는데, 다른 누군가 지나가며 한마디 한다. “뭘 그렇게 찾아?” “분명히 클립을 꺼내두었는데 보이지 않네.” “거기, 연필 뒤에 있잖아.” “이게 왜 안 보인 거지?”

과연 클립은 안 보인 것일까, 아니면 못 본 것일까? 대개는 안 보인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아마 일부는 못 본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둘 다 틀렸다고 생각한다. 둘 다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안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분명히 열심히 클립을 찾았으니 ‘안 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다.’의 진짜 정의다.

다시 절정의 인기를 누리는 탤런트 송혜교와 남아메리카를 상징하는 독수리,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생동감의 상징 임팔라, 남극의 신사 펭귄을 한번 비교해보자. 공통점이 있는 동물을 둘씩 묶는다면 어떻게 될까? 조류인 독수리와 펭귄을 묶으면 사람과 임팔라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나는 사람과 독수리, 임팔라와 펭귄을 묶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보는 방법이 같기 때문이다.

보는 방법이 다르면 눈의 위치와 기능도 달라진다. 같은 눈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 눈과 독수리 눈은 포식자의 눈이다. 이들의 눈은 얼굴의 정면에 위치한다. 이 눈은 마치 쌍안경처럼 작동하면서 목표인 대상을 추적한다. 올빼미의 눈을 한번 생각해보라. 사람처럼 얼굴의 정면에 두 눈이 위치해서 먹잇감을 정밀하게 추적한다. 독수리의 눈도 마찬가지고, 호랑이의 눈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생태계의 정상에 있는 포식자의 눈이다. 이 눈은 먹잇감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옆이나 뒤를 볼 필요가 없는, 목표와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그야말로 ‘보는’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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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팔라와 펭귄의 눈은 어떤가? 눈이 머리의 양쪽 측면에 위치해서 최대한 좌우 시야각을 넓게 확보하는 것이 이들 눈의 일차적 목표다. 그다음 목표가 먹잇감을 찾는 일이다. 어디서 덮칠지 모르는 사자를 경계하는 임팔라의 눈이나, 호시탐탐 노리는 바다표범을 경계하는 펭귄의 눈은 기능도 위치도 같다. 이들의 눈은 180도를 훨씬 넘는 시약 각이 필수다. 그래서 이들의 눈은 무엇보다 ‘잘 보이는’ 눈이다.

잘 ‘보이는’ 눈을 이기기 위해 사람과 독수리는 이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더 잘 ‘보는’ 눈이 필수다. 서로 다른 이 두 눈의 목적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생존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이런 관점으로 책상 위의 클립을 찾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과연 잘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책상 위의 클립 하나를 찾지 못한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대상조차 오 분 전에 자신이 올려놓은 클립이라면 또 어떤가? 이것을 과연 ‘안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못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안 보였거나 못 보았다고 해야 하는 주체는 죽어가는 임팔라나 펭귄이다. 이것은 단연코 ‘안 본’ 것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그런 것 말이다. 다행이라면 원시인이 아닌 현대인에는 이것이 바로 생존의 문제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눈뿐만이 아니다. 냄새를 맡는 후각도, 청각도, 촉각도, 미각도 마찬가지다. 먹잇감을 보았다고 덥석 물었다가는 독이 온몸에 퍼질지도 모른다. 주변이 불에 타는 냄새를 맡지 못하거나, 날카로운 발톱에 피부가 찢기는 것을 느끼지 못하거나, 다가오는 사자의 발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모든 감각은 생존과 직접적이고도 깊이 관련하면서 세계의 변화를 감각의 주인에게 전달한다.

이제 궁금해진 것이 하나 생겼을 것이다. 최고의 포식자이자 영장류인 인간이라면 어떤 동물보다도 잘 보고, 잘 듣고, 잘 냄새 맡고, 잘 느끼고, 잘 맛보아야 하지 않을까? 당연히 그렇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토록 감각이 둔해진 것일까? 이것은 우리의 뇌와 관련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쪽 뇌만 키운 결과다. 그렇게 커진 뇌가 우리의 좌측 뇌, 좌뇌(左腦)다.

앞서 설명한 대로 좌뇌는 언어, 논리, 수리, 추론과 같은 이성적 영역을 담당한다. 그래서 좌뇌는 논리적이며 이성적인 기능에 필요한 지식을 ‘학습과 경험’으로 축적한다. 물론 우뇌도 학습과 경험으로 능력을 키우지만, 미(美), 음(音), 상상, 공간지각, 통합, 직관과 같은 감성적인 우뇌의 특성은 학습과 경험에 비례해 커지지는 않는다. 놀랍게도 그 이유는 좌뇌가 우뇌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어떤 음을 듣고 아름답다고 느꼈을 때, 왜 그런지 논리적으로 설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좌뇌다. 음의 아름다움을 좌뇌가 이해하도록 우뇌가 설명할 수 있을까? 대부분 그렇지 않다. 그렇게 우뇌는 철저하게 좌뇌에 억압된다.

자신의 외부 세계를 감지하는 감각은 좌뇌와 우뇌의 명령을 동시에 수행한다. 그런데 어떤 대상을 보고 그에 관련한 엉뚱한 상상을 하는 우뇌를 좌뇌가 발견하면, 바로 우뇌를 통제한다. 그런 상상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이유다. 좌뇌는 그것을 느낀 감각에 ‘그만 볼 것을’, ‘그만 돌아설 것을’ 명령한다. 그러니 좌뇌에 통제되는 감각으로는 상상력 있는 관찰이 불가능하다. 좌뇌가 온몸으로 정밀하게 세계를 들여다볼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뇌가 좌뇌에 해방되는 경우는 단 두 가지다. 술과 같은 억제제(抑制劑)에 의해 좌뇌의 논리적 활동이 저해 당하거나, 잠을 잘 때다. 좌뇌가 잠들면 우뇌는 상상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다. 문제는 항상 술에 취할 수도, 잠만 잘 수도 없다는 데 있다. 게다가 이런 상태가 지나치면 현실에서 너무 멀어지는 맹점이 있다.

앞서 설명한, 꽃을 그린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의 말을 다시 생각해보자. “아무도 꽃을 보지 않지. 꽃은 너무나 작아서 우리는 꽃을 볼 시간이 없어. 그런데 말이야, 친구를 사귀는데도 시간이 필요하거든.” 그녀가 말한 ‘보지 않는다는 것’, 그것도 ‘시간을 갖고 자세히 보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을 것이다. 아름다움의 인식, 차원적 상상력, 인식된 세계의 통합과 같은 것들은 좌뇌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좌뇌는 마치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뇌를 대한다.

어릴 때 시각을 잃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생물학 교수 제라트 버메이(Geerat Vermeij)는 시각을 상실한 시각장애인이 기하학에 뛰어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일반인은 망막에 맺힌 이차원적인 상(像)을 중심으로 다른 감각정보를 종합하지만, 시각장애인은 시각이 아닌 감각정보를 공감각적으로 해석해 공간 이미지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다.” 이것은 우뇌를 주로 하는 감각인식이 가능해지면 차원 높은 새로운 세계에 더 잘 다가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전에는 그냥 무시했던 것들이 이제는 특별한 의미가 있게 되었다. 내 세계는 컴컴하거나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시각은 방대한 정보를 모은다. 감각정보의 70%가 시각정보다. 그만큼 시각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시각이 좌뇌만을 위한 시각이 되어서는 세계를 잘 공부할 수 없다. 이것은 한쪽 눈을 감고 보는 바람에 거리감을 못 느끼는 것과 같다. 다른 감각도 마찬가지다. 시각보다 정보량이 적은 나머지 감각을 더 잘 사용하지 못하면 세계를 보는 감각이 모두 닫히고 만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다른 감각도 시각처럼 잘 ‘보라고’ 강조한다. 들어보고, 냄새 맡아보고, 느껴보고, 맛보라고 말한다. ‘보다.’의 의미를 사전에서 확인하면 다른 의미가 하나 더 있다. ‘어떤 일을 경험하다.’의 의미가 그것이다. 보는 것은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그러니까 세계를 ‘공부하거나 탐구하는’ 유일한 도구는 감각이다. 그 감각이 우리 뇌의 한쪽만을 위한 것이 되는 순간, 우리의 탐구 능력은 거의 상실된다. 나이가 들면 왜 잘 공부하지 못할까? 감각이 노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큰 이유는 좌뇌에 지배되는 감각을 끊임없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는 대로만 본다. 그리고 아는 것과 다른 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 공부를 많이 해서 좌뇌를 커다랗게 만든 사람이 오히려 고집불통이 되기 쉬운 이유다. 세계는 계속 그리고 정신없이 변하는데, 좌뇌가 보라는 대로만 봐서야 하겠는가? 노화로 인해 세계를 잘 볼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안경을 써서라도 잘 보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그런데 잘 보는 눈을 갖고도 잘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의 탐구, 세계에 관한 공부는 감각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공부를 잘했던 수도 없는 천재들은 하나같이 감각을 열어 제대로 세상을 보라고 말했다.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보라고 말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발견이란 미지의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시인이자 평론가이며, 소설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도 이렇게 말했다. “과학자는 우주의 한 점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고, 시인은 시간의 한 점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느낀다.” 철학자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도 이렇게 말했다. “나의 모든 감각에 말 거는 나의 모든 존재와 더불어 전체적이고 융합적인 방법으로 지각한다.” 지금까지 앞에서 언급했던 조지아 오키프, 파블로 피카소, 소피아 코발렙스카야와 같은 천재들이 무엇을 말했는지 다시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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