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현실의 실체를 파악하라.

<조조처럼 대담하라>

by 더굿북

어느 여름, 마침 장막이 진궁과 함께 조조에게 반기를 든 뒤 여포를 맞아들였다. 많은 군현이 호응했다. 순욱과 정욱이 견성을 보위하고, 범현과 동아현 2개 현을 고수했다. 그 사이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여포가 도착해 견성을 쳤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서쪽 복양에 주둔했다. 조조가 말했다.

“여포는 하루아침에 한 주를 얻었다. 동평을 근거로 항부와 태산의 길을 끊고, 험지를 이용해 우리를 공격지 못하고, 오히려 복양에 주둔하고 있다. 나는 그가 무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는 마침내 진군해 공격했다.
_ 『삼국지』 「위서, 무제기」


혼돈의 시대에 어떻게 인재를 알아볼 것인가?

소설 『삼국연의』에는 조조가 부친의 친구 여백사를 무고하게 죽이자 진궁이 조조의 곁을 떠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진궁은 조조의 믿음을 저버린 채 반기를 들어 여포를 주군으로 삼은 인물이다. 진궁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었다. 그래서 조조를 배반하고 여포를 선택한 것이다. 조조와 여포는 인품과 실력 등 여러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격변하는 현실 속에서 누구라도 인물을 제대로 알아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평가가 상반되는 인물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진제국을 멸망케 한 ‘진승과 오광의 난’

역사 속에서도 상반된 평가를 받는 진승과 오광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큰 꿈을 품은 자를 잠룡(潛龍)이나 대붕(大鵬)으로 표현했다. 『사기』 「진섭세가(陳涉世家)」는 특이하게 홍혹(鴻鵠)으로 표현해 놓았다. 기원전 210년 7월, 진시황이 지금의 하북성 광종현 서북쪽의 사구평대(沙丘平臺)에서 숨을 거뒀다. 마지막 천하 순행인 제5차 순행에 나선 지 9달 만이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그해 겨울 10월, 진나라 음력으로는 원년에 2세 황제 호해(胡亥)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당시 호해는 21세였다. 새해의 시작을 계기로 황제와 신민 모두 심기일전하자는 취지에서 대사면령을 발포했다. 이어 조고를 궁전 출입을 총괄하는 낭중령으로 삼아 국사를 돌보도록 했다. 호해가 조고와 천하대사를 논의했다.

“짐이 나이도 어리고 이제 막 즉위한 까닭에 백성들이 아직 가까이 따르지 않고 있소. 선황은 천하 순행을 통해 나라의 강대함을 보여줌으로써 위엄으로 복종시켰소. 이제 짐이 한가로이 지내면서 순행하지 않는다면 약하게 보여 천하의 백성을 신하로 삼아 양육할 도리가 없게 될 것이오.”

대사면령을 발포한 지 세 달 뒤 화창한 날씨에 호해는 처음으로 천하 순행에 나섰다. 좌승상 이사가 호해를 시종했다. 이번에는 진시황의 제5차 순행을 거꾸로 되짚어 나갔다. 먼저 지금의 요녕성 수중현 동남쪽의 갈석에 이르렀다가 해안을 끼고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절강성의 회계산에 이르렀다. 각석(刻石)에 미처 다 새겨 넣지 못한 내용을 완성했다. 당시 대신으로서 시종했던 자의 이름까지 새겨 넣었다. 2세 황제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셈이다. 호해의 언급이 그 증거다.

“각석에 새겨진 내용은 모두 시황제가 남긴 업적이다. 지금 짐이 ‘황제’라는 칭호를 이어받아 사용하는 마당에 각석의 글귀에 ‘시황제’를 칭하지 않는다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짐이 한 일처럼 보여 시황제의 공업과 덕을 밝힐 수 없게 될 것이다.”

좌승상 이사가 말했다. “청컨대 황제의 조서를 각석에 자세히 새겨 그 연유를 밝게 드러내기 바랍니다.”
“옳다.”

그해 4월, 2세 황제 호해는 진시황의 급서로 중단된 아방궁 축조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이 또한 선황의 공업을 널리 떨치기 위한 것이었다. 애초 아방궁의 축조는 진시황 35년인 기원전 212년에 시작되었다. 진시황이 자신의 능묘를 미리 조성하는 여산의 수릉(壽陵) 조영도 함께 전개됐다. 이때 중원 일대의 백성과 죄수가 대거 동원됐다. 화북 일대의 백성과 죄수가 대거 동원된 만리장성 축성 작업으로부터 불과 3년 뒤에 시작된 까닭에 민심이 흉흉했다. 각지에서 유민이 격증하면서 치안이 크게 불안해졌다.

이해 가을 7월, 마침내 일이 터지고 말았다. ‘진승과 오광의 난’이 그것이다. 진시황이 급서한 지 꼭 1년 만에 빚어진 이 사건은 이후 중국사상 최초의 제국인 진제국이 일거에 무너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진승과 오광의 난’은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다투는 ‘초한지제(楚漢之際)’의 발단에 해당한다. 이 난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됐다. 초기에는 말할 것도 없이 진제국과 정면 대결하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군웅이 사방에서 봉기한 이후에는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들과 충돌하는 새로운 상황이 빚어졌다. 진승과 오광은 이 과정에서 이내 몰락하고 말았다. 항우와 유방은 바로 이들의
몰락을 계기로 역사의 무대에 새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이다.


새로운 세상은 어떻게 열리는가?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면서 「공자세가」와 같은 차원에서 특별히 「진섭세가(陳涉世家)」를 편제해 진승의 공적을 기린 것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나온 생각이다. 진승이 봉기를 들지 않았다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않았다는 의미다. 훗날 반고는 『한서(漢書)』를 저술하면서 사마천의 이런 편제에 크게 불만을 품고 진승의 행적을 ‘세가’가 아닌 ‘열전’ 차원으로 깎아내렸다. 『한서』에 「진섭세가」가 아닌 「진승항적전(陳勝項籍傳)」이 편제된 이유다. 반고는 「진섭세가」는 말할 것도 없고 「항우본기」조차 ‘열전’으로 폄하한 뒤 「진승항적전」으로 함께 묶어 처리한 것이다. 진승과 항우 모두 일종의 반란집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애초 진승과 오광의 봉기는 그 배경이 매우 단순했다. 두 사람은 마을의 이장 같은 역할을 했다. 진나라는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이 통일돼 있었던 까닭에 이장이 군리(軍吏) 역할도 겸했다. 두 사람은 수자리를 서기 위해 현위(縣尉)의 지휘 아래 9백여 명의 백성들을 이끌고 북경시 밀운현 서남쪽으로 향했다. 도중에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안휘성 숙현 남쪽 일대에 머물렀다. 이때 공교롭게도 갑작스레 큰 비가 내렸다. 이내 물이 범람해 길이 모두 끊겼다. 정해진 기일에 도착하기 어렵게 되었다. 진나라 법은 매우 엄격해 기한을 어긴 자는 모두 참수형에 처했다. 진승과 오광이 서로 모의했다.

“이제 도망쳐도 죽고, 모반을 일으켜도 죽는 꼴이 되었는데 이왕 죽을 것이라면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오광의 말에 진승이 맞장구를 쳤다.

“지금 천하가 진나라의 통치로 고통을 받은 지 오래야. 내가 듣건대 호해는 막내아들인데 부당하게 즉위한 것이고, 응당 보위를 계승할 사람은 장남 부소라고 들었네. 백성들은 부소가 현명하다는 얘기만 여러 곳에서 들었을 뿐 그가 죽은 사실을 모르고 있지. 전국시대 말기 초나라 명장 항연은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고 사졸을 아껴 초나라 사람 모두 그를 좋아했네. 어떤 사람은 그가 죽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도주해 숨었다고 말하지. 만일 우리 무리가 거짓으로 부소와 항연을 자칭하며 천하를 위해 앞장서면 이에 호응하는 자가 많을 것 아닌가.”

진승과 오광이 곧 관리를 죽인 뒤 무리를 모아놓고 선동했다.
“우리 모두 기한을 넘긴 까닭에 참수되고 말 것이다. 설령 정상을 참작해 참수를 면할지라도 수자리를 서다 죽는 자가 10중 6, 7은 될 것이다. 이왕 죽을 것이라면 큰 이름을 내야 할 것이다.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을 수 있겠는가(王侯將相, 寧有種乎)!”

무리가 모두 큰소리로 호응했다. 진승은 젊었을 때 머슴이 되어 남의 농사를 지은 적이 있었다. 하루는 밭두둑에서 일손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다가 문득 동료 머슴들에게 이같이 말했다.

“만일 부귀하게 되면 우리 서로 잊지 말도록 합시다.”
머슴들이 크게 비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당신은 머슴으로 있는 주제에 어찌 부귀를 이룬다는 것인가?”
진승이 탄식했다.
“아! 연작(燕雀)이 어찌 홍혹(鴻鵠)의 뜻을 알겠는가!”

연작은 제비와 참새 등의 작은 새로 소인을 상징한다. ‘홍혹’은 봉황처럼 상서로운 새를 뜻한다. 진승은 남의 머슴살이를 할 때부터 ‘홍혹’의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 확실히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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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붕의 꿈’을 꾼다고 누구나 이루는 것은 아니다.

진승과 오광은 공자 부소와 항연을 사칭하며 무리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이들은 단(壇)을 세워 맹약한 후 나라 이름을 ‘대초(大楚)’라고 했다. 항우와 유방 등 군웅이 일거에 일어나게 된 배경이다. 진나라의 패망은 여기서 시작됐다. 후대의 사가들은 진나라가 엄한 법제로 천하를 통일했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15년 만에 패망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토록 엄한 법제만 아니었다면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희박했다고 본 결과다.

사마천이 「공자세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진섭세가」를 쓴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장자』 「소요유」는 ‘홍혹’을 대붕(大鵬)으로 표현해 놓았다. 해당 대목이다.

“북쪽 바다에 한 물고기가 있다. 이름은 곤(鯤)이다.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변해 새가 되니 이름이 붕(鵬)이다. 붕새의 등 넓이도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온 힘을 다해 날면 그 날개가 하늘에 구름을 드리운 것 같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명(南冥)으로 날아간다. 남명은 천지(天池)를 말한다.”

남명의 명(冥)은 거대한 바다를 뜻하는 말로 아득해 끝이 없는 상상의 바다를 지칭한다. 곤(鯤)은 원래 작은 물고기의 이름이다. 장자는 이를 상상 속의 큰 물고기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천지(天池) 역시 상상 속에 존재하는 ‘하늘의 못’을 말한다. 붕(鵬) 또한 상상 속의 새이다.

대부분 주석가는 곤이 변한 붕새가 남명으로 날아가는 것을 두고 만물 본연의 ‘무한한 자유’를 향한 비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게 과연 북쪽에서 남쪽으로 날아간다고 가능한 것일까? 사실상 이는 제왕의 길을 뜻하는 대업(大業)을 돌려 표현한 것이다. 환관 집안 출신인 조조가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군웅들과 함께 군사를 일으킨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붕의 꿈’을 꾼다고 누구나 다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그 첫걸음은 우선 내가 마주한 현실을 냉정히 읽어내는 것이며, 다음으로 무엇보다 먼저 내가 마주한 현실과 상대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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